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nZ Mar 22. 2021

명함 같은사람

필요에 응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명함이 생긴 지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났다. 그 사이 부모님을 만날 일도, 내 근황을 궁금해하는 지인들을 만날 일도 많았지만 명함은 아직도 내 업무 책상 한 켠에 수북이 쌓여 있다.


나는 아직 누구에게도 명함을 준 적이 없다.


직사각형의 정갈한 모양새가 부끄러웠을까.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었을까. 누군가 내게 이유를 묻는다면, 나는 어떤 질문에도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명함을 자랑하고 싶었다. 사회초년생인 내게 명함은 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종의 증표 같았다. 그랬기에 부모님께 명함을 나눠드리며 당신 딸이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친구들에게도, 나와 지속적으로 연락을 해야 하는 PD들에게도 명함을 나눠주고 싶었다.


문제는 꼭, 꼭 그럴 때마다 필요한 명함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일 아침 책상 위의 명함통을 보며 '오늘은 꼭 챙겨가리라' 다짐했지만, 열에 아홉은 빈손으로 퇴근하기 일쑤였다. 최근엔 숄더백에 명함을 챙기는 데까지는 성공했으나, 약속 날에 가방을 바꿔 매고 나간 탓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세 번의 명함 전달 미션 실패 후 부모님과 네 번째 약속을 잡은 날, 이를 갈며 생각했다.


'외출 준비를 마친 후, 숄더백의 명함을 지갑에 옮겨 넣고, 부모님을 뵈러 간다!'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1시간 후의 나는 1시간 전의 나보다 무지했다. 부모님을 만나 자신 있게 지갑을 꺼내는 순간 익숙한 위화감에 몸이 떨렸다. 지갑에는 인턴 당시 받았던 사수들의 명함에서부터 현재 있는 방송국의 팀원들과 임원들, 이제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명함들로 가득했다. 역시나 내 명함은 없었다.


'그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잘 준비되어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지갑 속에 숨 쉬는 명함의 주인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모두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도 유연하고 자연스레 명함을 건네며 자신을 소개했었다. 그래 어쩌면, 끊임없이 소통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에서 자기 PR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들의 모습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적재적소에서 최선의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낼 준비가 된 사람들이었다.


'준비된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방송국의 상황은 항상 바쁘게 돌아갔고,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나는 어딜 가든 성실하고 꾸준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동시에 다소 둔감하고 임기응변에 취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고 성실히 일하더라도, 꼭 급박한 상황에서는 미흡한 사람으로 비치기 일쑤였다. 내 준비에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사회가 요구하는 준비에는 재간이 필요했다. 늘 상황을 자신에게 맞추던 나는 이제 상황에 나를 맞추는 연습을 해야 했다.


이런 내 모습은 마치 책상 위의 명함 같았다. 잔뜩 준비했지만 정작 필요한 순간에 쓰이지 못하는, 그래서 고스란히 먼지를 입고 마는. 나는 조용히 기도했다. 언젠가 이 명함통이 다 쓰이는 날, 조금 더 유연한 사회인이 되어 있기를. 조금 더 다양한 상황에, 조금 더 능한 사람이 되어 있기를. 매일 같이 하는, 주문과 같은 기도였다.


        



이전 05화 어른이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