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사실 정의에 큰 관심이 없다.

법정물에 빠지게 해 준 책, <합리적 의심>

by 수빈 Soobin

마지막까지 강렬한 인상을 준 책.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이라 더더욱 뇌리에 남았다.


이 책을 한 마디로 리뷰하자면 이거다. "법은 최후의 가치인가?"



법원에서는 법을 최후의 가치로 보고 있다. 형법의 경우에는 그 벌이 무겁기 때문에 합리적 의심이 전혀 없을 때까지 판사들 간에 합의를 한다고 한다. 소설 속 피고(김유선)는 심증은 많았지만 물증은 없었다. 즉, 법에 따르면 피고는 무죄였다. 하지만 화자는 합의된 결론을 무시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어찌 보면 독자 입장에서는 후련한 선고였지만, 그에게는 합의를 무시하고 판결을 내렸으니 큰 리스크였다. 실제로 화자가 합의를 어겼다는 사실은 법원 내 소문이 돌았고, 화자는 해고될 위기에 처한다. 결국 법원에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정확하게는 이미지 관리를 위해) 항소에서 피고 김유선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사실 그녀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이 책의 핵심이 아니었다. 저자가 꼬집는 것은 죄를 짓고도 떳떳해하는 범죄자가 아니라, 그들을 당당하게 만드는 현 법 시스템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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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 생활을 하면서 두 가지의 상반된 생각이 '아주 작은 폭'을 그리며 진자처럼 운동을 해왔다. 그 하나는, 법률은 획일적으로 적용되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치 실존적 결단을 내리듯 법의 경계선을 조금 무너뜨리더라도 결론의 정당성을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올바른 결론을 재판에서 찾아낸다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고 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외피적인 사실에 법률을 정확하게 적용하는 일이 최대한이지 않은가, 도달할 수 없는 '진실'에 손을 뻗기보다는 법 시스템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재깍재깍 돌아가기만 해도 역할을 다하는 것은 아닐까, 판사가 그 이상을 달성하려 하는 게 또 다른 오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러다가도 역시, '법대로만'보다는 어떻게든 '올바른 결론'을 바라는 게 우리 사회의 정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또다시 찾아든다." - 15p, 도진기, <합리적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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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재판이라는 것이 컨베이어 벨트의 한 단계로 느껴진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재판은 '법과 절차를 빈틈없이 준수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일 뿐, 솔로몬의 지혜를 발휘해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 보니 피해자에게 감정 이입하는 화자는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는 매력이 있었으나, 판사로서는 실격이었다. 나는 그 점이 안타까웠다.


법은 정의에 큰 관심이 없다. 절차만 정의로울 수 있다면 그걸로 끝이다. 나머지는 우리가 모르고, 알 수 없는 거기에.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법을 최후의 가치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책을 읽은 후에는 선뜻 답을 내리기가 어려워졌다. 심증은 많지만 물증이 없어 무죄로 풀려나는 수많은 범죄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또다시 희생당하는 시민들... 이 악순환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상식에서 벗어나는 법은 진정 최후의 가치로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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