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살롱 May 23. 2019

이제 분갈이를 해야 할 때

부모님, 나의 사랑하는 화분에게

밤 12시, 새벽 2시.

아빠는 구남친의 '자니?' 타임에 문자나 전화를 한다. 어젯밤도 그랬다. 가끔 과하게 감성적이다. 문자가 왔다. '오늘도 잘 살고 있니?' 잘 살고 있다고 답 문자를 보내니 걸려온 전화. 목소리에서 알코올 냄새가 난다.


"아빠, 쓸쓸해? 쓸쓸해하지 마."
"아빠 나이가 되면 나이 든다고 쓸쓸하고 그런 거 없어."

거짓말. 나도 쓸쓸한데 아빠가 쓸쓸하지 않을 리 없다.

"사람들이 내년에 칠십이라고 뭐라고 이야기하고 그래."
"아빠 옛날에나 칠십이 많은 나이지, 요즘은 아니야. 옛날 오십, 육십 같은 거지. 너무 불안해하지 마. 그리고 미리 생각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그때 우리 같이 대처하면 돼.
"그런 거야 뭐 기분 상하고 그러지 않아. 손주 갖고 자랑하고 그래. 그런 데는 그냥 안 가. 내가 어디 가서 우리 딸이 서울에서 학교 나와 큰 회사 다니고 지가 번 돈으로 유학 갔다 오고 했다 그러면 다들 아무 말 못 해."

이런, 지난 10년 동안 자랑거리가 전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아빠가 쓸쓸한 이유는 나야 나.

"아빠, 신랑 없이 손주만 만들어줄 수도 없고 그건 내가 어떻게 못하겠네. 남의 시선 신경 쓰지 마요. 내가 잘 살고 행복한 걸 남에게 증명할 필요 없어. 나에겐 또 그들이 모르는 자유로움이 있고 그래."  

'센 척' 한다.

쉬는데 전화해서 미안하다는 아빠에게 아니라고 전화 잘했다고 통화를 마무리하려는데 그러신다.

"자신감을 가져."

들켰나? 나 지금 혼란스러운 거, 밤이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가 아침이면 아무 일도 못 할 것 같은 답답함이 엄습하는 거 눈치챘나? 목소리에 물기 있는 건 알았겠지만... 혹 집에 무슨 우편물이라도 갔나?



아빠의 '센 척'을 이제 내가 한다

'돈 필요하면 말해라, 힘들면 내려와라'라는 말은 아마 지방 출신의 상경한 딸이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꼭 잘 살고 있을 때 이런 소리를 해서, '참 아빠는 나를 모르네' 했다. 내려간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내 고향은 고작 한 시간 거리다. 돈이야 어쩌다 목돈 필요한 때도 동생에게 부탁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말이 아빠의 '센 척'임을 알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도 모든 일에 준비된 게 아니서. 맏딸이라 원래 스스로 알아서 일처리를 해왔지만, 사회 나와 직장생활을 하며 나이 들고 보니 점점 아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짠하다. 한바탕 대든 딸에게 새벽 2시에 '미안하다' 문자를 보내는 감성의 소유자 아빠에게 이 건빵같이 퍽퍽한 세상살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부모님을 생각할 때면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린다. 내가 아이일 때 그토록 “이건 뭐야?” “왜?”를 묻고 해달라고 했듯, 이제 아빠 엄마가 “폰으로 뉴스 볼 때 이거 글씨는 어떻게 키우는 거야?” “커피 캡슐 맛있는 게 뭐야?” 묻고 나는 답을 찾고 원격으로 주문해드리는 컨시어지가 되어 있다. 앞으로 부모님은 이보다 더 아이 같은 케어가 필요해지실 거다. 영화 후반부 아기가 된 벤자민 버튼이 그랬던 것처럼.

초등학교 때 아빠는 나를 데리고 치과에 가서 치료가 끝나면 애썼다고 고려당 아이스크림을 사주거나 카파 손목시계를 사줬다. 그때처럼 이번에는 내가 말 안 듣는 아빠를 대학병원 종합검진에 데려가기 위해 연차를 내고 집으로 내려가 아빠와 병원에 동행한 적이 있다. 그러고 우리는 설렁탕을 먹었나.



모든 식물은 분갈이를 해야 더 크게 자란다

나를 키워준 나의 화분, 나의 부모. 사랑해 마지않는 그 단단한 화분 안에서 나는 그래도 밥값 하며 사는 생명으로 자라났다. 인생의 절반쯤 온 지금이 되니,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서점을 하셨던 아빠 때문에 활자에 노출될 일이 많았고 또래보다 조숙한 책을 읽기도 했다. 서점 집 딸은 기자가 되었고, 나의 동료 기자 중 한 명은 신문보급소 집 아들이었다. 리본 도매상 부모님을 둔 친구는 화장품을 리본 같은 소품을 활용해 예쁘게 꾸며 광고 촬영을 한다. 어린 시절 생일이면 아버지가 웨스틴조선부터 해서 각 호텔의 케이크를 사오는 작은 허세를 부려주신 친구는 푸드 스타일리스트가 되었다. 우리는 모두 부모라는 안전한 화분 안에서 각자 이유 있는 모종으로 자랐다.

하지만 이제 분갈이가 필요함을 느낀다. 더 성장하기 위해. 식물은 분갈이를 하지 않으면 클 수가 없다. 양가 모두 공무원, 교사, 은행원 등 보통의 야무진 사람들만 가득한 우리 집안에서 엄마는 그저 안정된 직장을 최고로 여기고 조언을 한다. 어딘가 갑갑할 수밖에. 미국에선 이미 부장, 차장급의 중간관리직이 사라지고 있다. 지금 여기는 그분들이 겪은 세상과 다르고 나를 키워준 그 가치관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건 비밀인데, 언젠가부터 내가 힘들 때면 잔소리꾼 엄마를 멀리하고 부모님집에서 2박 이상은 머무르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고 죄책감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마흔 병을 치유하려고 읽었던 제임스 홀리스의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에서 이런 죄책감의 면죄부를 얻을 수 있었다. 많은 순간 자기 검열을 하는 ‘나’는 부모나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일지 모르고 그 권위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칼 융의 심리학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부모 콤플렉스. 우리는 그것을 마주 대하고,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내 마음속에서 합법적으로' 착한 딸 페르소나 독립선언'을 하는 순간이었다.

마흔 병을 낫게 해 보려고 지난해 셀프처방전으로 읽은 책들. 이 중 가장 도움이 된 건 칼 융 심리학 관점으로 마흔을 이야기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였다.


우리를 키워준 부모님과 환경이 우리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가두는 것도 명백하다. 모든 부모가 훌륭한 사람일 리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부모님 당신들도 완벽한 부모의 자식이 아니었듯이.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이야말로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가장 큰 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부모님이 항상 옳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조금 더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 그것이 오히려 부모님이 원하는 더 멋진 나 혹은 더 행복한 나를 만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의 삶을 살기 위해.

화분을 벗어나면 처음엔 들썩거린 흙 때문에 땅이 무너진 느낌이 든다. 하지만 나는 계속 내가 딛고 설 땅을 다지기 위해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내딛을 예정이다. 그렇게 필요한 아이템을 하나씩 따먹으며 인생이라는 이 게임을 해야겠지.

그리고 다시금 부모님이 감사하다. 이렇게 다소 ‘불경스럽지만 필요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역설적으로 아빠 엄마가 잘 키워주신 딸이어서니까.

사랑합니다, 나의 화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