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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한나 May 04. 2020

빨간 신호등에 멈추는 것처럼

스페인 마요르카 섬

 마드리드에서 떠나기 며칠 전부터 몸이 안 좋더니 마요르카섬에 와서도 계속 몸이 안 좋아서 구경도 별로 하지 못하고 숙소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들도 나에게 옮았는지 마드리드에서 머문 마지막 날 새벽에 갑자기 일어나서 울면서 기침하고 아파해서 이틀 밤을 설쳤더니, 그 피곤이 쌓여서인지 유독 몸의 회복이 느렸다. 숙소 창문에서 보이는 예쁜 색깔의 비치가 바로 코 앞에 있는 데 나가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괜히 나 때문에 제대로 섬 구경도 못하고 아들을 데리고 나간 남편한테 미안했다. 가까이 있는 비치에 나가지도 못하니 너무 아쉽기도 하고 말이다. 몸이 아프니 마음도 연약해져서, 이 장기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하지 않고 어디서 몇 달간 안정적으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Alcudia Beach, 공항에서 50분 정도에 거리에 있는 이곳에 머물렀다


때론 우리는 휴식하는데 익숙하지 않나 보다. 우리 몸은 그 무엇보다 정직해서 우리에게 ‘멈춤’의 사인을 보낸다. 우리가 멈춰서 쉬지 않으면 앞으로 더 힘들 것을 알기에 미리 알려주는 거다. 여행을 하면서 아플 수도 있는데 그때 우리가 뭔가를 놓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신호등을 건널 때 빨간 불이 켜지면 멈추는 것처럼 그냥 잠깐 멈춘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보이는 비치에 가지 못해서  아쉽고, 가족에겐 미안하단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근데 그런 생각을 갖는 건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을 결정할 수 있는 건 내 자신밖에 없으니, 그런 생각이 들 땐 생각의 흐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Alcudia Old Town, 유럽은 꽤 많은 지역에 이렇게 올드타운이 있다.  비슷한 듯 하지만 정말 다 다르다 신기할 정도로.


쉬는 것의 소중함은 그전에 느꼈던 건데, 때론 자주 망각하는 것 중의 하나인 것 같다. 몇 년 전, 갑상선암 수술 때문에 몇 달을 쉬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시간이 쉽지 않았던 건,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걸 이겨내기가 힘들었다. 나의 존재 가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있는데, 내가 정해 놓은 기준에 미달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거 같아서 말이다. 아프고 나서 직장도 관두고, 건강 회복에 전념했던 그 시간은 지금 생각하면 내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준 귀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때 당시엔, 내 마음과 싸워내는 것에 지치는 시간이었다. 이제 난 직업도 없고, 건강을 잃은 그냥 나약한 존재인 것만 같아서 말이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교훈은 ‘ Who I am’ 이 ‘ What I do’ 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 시간을 통해서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무엇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지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나고 나니 그 시간들은 나에게 고통의 시간이 아닌, 배움의 시간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일 수는 없을 것이다.



Calo des Moro. 찾는 게 쉽지 않아 앞의 두 사진은 잘못 찾아가서 발견한 곳이었다. 찾기 어려웠던 만큼 아름다웠던 비치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에 고통의 시간을 겪고 계시는 분이 혹시 있으시다면, 그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그대 안의 이미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던 나에게 한 줄기 희망 같은 메시지였다. 지나간다는 건 언젠가 끝이 있다는 것이기에 말이다. 근데 정말 끝이 있었다. 우리는 또 다른 모습의 고통을 마주하겠지만 그때는 더 의연하게, 더 열심히 싸울 수 있는 건 고통의 경험으로 단련된 우리의 단단해진 마음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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