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일복을 타고났다. 시험 복은 없었지만 일단 합격 후에는 신규 때부터 부장 도망가고 밤 11시에 퇴근하고... 엑셀과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일이 너무 많아서라면 이해를 할까? 아무튼 엑셀을 마스터한 이후로 야근은 별로 없었지만 여전히 매년 일복은 쌓여 갔다.
그러던 내가 이제 좀 꿀보직을 맡아서 행복한 잉여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코로나라는 뜬금없는 변수로 또다시 일 폭탄을 맞았다. 다행히 1학기 초반에 반짝 그랬고 Zoom 실시간 원격 수업이 안정되고 나서는 오히려 일이 없었다. 원래 정보부장 자리가 권한 주고 컴퓨터 세팅하는 업무인데 학기 초에만 일이 많고, 교육청에서 학기 중에 루틴 하게 오는 공문은 정말 중요한 것 빼고는 올해부터 거의 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각 학교의 정보부장의 업무가 헬게이트가 된 상태에서 서류 놀이 같은 공문을 보내는 것은 자기네들이 생각해도 부끄러웠을 거다. 뭐 그럼에도 원문 공개율은 참 꾸준히도 오더라. 이 시국에 원문 공개율로 학교 줄 세우기를 하다니... 그 교육청 담당자는 모르기 몰라도 대단한 꼰대임이 틀림없다.
우리 학교 원문 공개가 바닥을 치던 말던 나는 상당히 유유자적했다. 보여 주기 식 서류를 가장 안 좋아하던 나는 적성에 맞는 3D 프린터 놀이를 하러 매 공강마다 잠적을 했다. 불 끄고 조용히 사포질도 하고 모델링도 공부하고 이것저것 뽑아 보기도 하며 나름 해피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우리 학교는 이런 연구(?) 활동을 장려하는 분위기라 농땡이 친다고 뭐라 하지는 않고 대신 건강에 안 좋으니 창문 좀 열고 지내라 청소는 좀 하고 살아라 같은 잔소리는 좀 들었다.
근데 역시 너무 많이 놀았던가? 나보고 담임을 하란다. 2학기에 군대에 가는 젊은 선생님이 계신데 그 반의 부담임이 나란다. 아무래도 교사 기근에 시달리던 교무부는 지친 것 같았고 나는 좀 튕기다가 그냥 받았다. 사실 이제 딱히 할 일도 없고 뭔가 하라는 교육청의 공문들은 대부분 원격 수업이 정착이 안 된 학교를 위한 거라서 나와는 상관이 없었다. 심심했다.. 사실 그 이유가 가장 컸던 것 같다.
다행히 2학기 계모로 들어갔지만 전 담임의 섬세한 인수인계로 순조롭게 아이들과 지내고 있다. 아직 오프라인 개학을 안 해서 아침 8시부터 1교시 전까지는 무조건 얼굴을 보며 조례를 했다. 30분 내내 떠드는 것은 아니고 교실에 수업 방 열어 놓은 후 교무실에 와서 교사로 접속해서 조례 전까지 웹캠을 틀고 업무를 보았다. 가끔 실수로 음소거를 안 해서 업무 이야기가 아이들에게도 흘러들어 가는 것 같지만 별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고... 아이들에게 '담임'의 얼굴이 익숙해질 때까지 얼굴은 계속 보여줄 참이다. 아이들도 제법 익숙해져서 이제 조례도 잘 들어오고 애교도 곧잘 부린다.
원격 수업이 주는 장점은 아마 아이들 생활지도가 확 줄어든 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아침에 안 일어나는 학생들을 위해 일일이 모닝콜을 하거나 수업에 빠진 학생들의 온라인 클래스 주소를 일일이 챙겨주는 것이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히 대면보다는 생활지도 영역이 줄어들었다. 물론 이런 공백기를 거쳐 몇 주 안 되는 등교 수업으로 라포가 형성될지 걱정은 조금 된다.
내년에는 계속 있을지 모르는 원격 담임. 참 신선한 경험이다..
☞ 그 뒤 담임 이야기 : 카톡 별에서 온 아이들 (https://brunch.co.kr/@soori/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