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세미 Nov 21. 2021

편도티켓의 여행

10. 소리도 없이

하리는 수술 대신 늘 다니던 동네 동물병원에서 약물치료를 시작했다.

약 효과는 즉각적이어서 그 날 이후 코피도 나지 않았고, 귀의 염증도 가라앉았다. 무엇보다 하리의 컨디션이 나날이 좋아져서 평소보다 밥도 물도 잘 먹고 살도 포동포동 쪄갔다.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오자 크리스마스에 벌어진 일들이 잠깐 꾸고 깬 악몽처럼 느껴졌다.




“하리가 부쩍 애교가 늘었다.”

“아팠다 나아서 그런가?”

하리를 표현하는 단어로 적당한 건 도도함과 귀차니즘이 있다. 불러도 웬만해선 쳐다보지 않는 도도함과 세상만사 귀찮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귀차니즘의 조합체가 하리다. 그런 하리가 부쩍 엄마 옆에 달라붙어 손길을 갈구하고, 밤이면 내 손을 열심히 그루밍해 주고, 전과 달리 혼자 있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하리를 보며 엄마와 나는 애교가 늘었다며 좋아했다.


한 번은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는데 하리가 풀쩍 뛰어올라와 자꾸만 내 팔에 얼굴을 부딪쳤다. 쓰다듬어 달라는 표시였다. “우리 이쁜 하리 왔어?”하며 얼굴을 쓰다듬어주려는데 고개를 들어 내 얼굴에 쪽.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름을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던 우리 도도한 고양이 하리가 뽀뽀를 해주다니! 물론 이후에 너무 흥분한 나머지 하리 얼굴에 쪽쪽 뽀뽀를 퍼부었더니 그대로 폴싹 책상 아래로 내려가 가버렸지만.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 돌봐주고 돌봄을 받는 다는 것.

조용한 위로와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모두 고양이를 키우기 전엔 몰랐던 감정들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 그리고 여름.

계절이 변하는 동안 소리도 없이 하리는 점점 다시 컨디션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다시 코피가 섞인 콧물이 나기 시작했고, 코가 막혀 숨을 잘 쉬지 못했다. 숨을 쉬지 못하니 잠도 자지 못했고 늘 멍하니 깨어있는 상태로 앉아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하리는 야옹하고 울거나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조용히 시들어가는 하리. 나는 온통 하리의 막힌 코를 뚫어줘야 한다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하리의 코를 뚫어주려고 병원을 8군데를 찾아 다녔다. 세 번의 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았고 그 후유증으로 하리는 빈혈을 얻었다. 다시 병원에 찾아가 수혈을 했고 집에는 산소방을 마련해두었다.


“네가 서운하게 생각할지는 몰라도… 엄마 생각에 하리는 이제 낫지 못할 것 같아.”

어느 날 엄마가 설거지를 하다 말했다. 그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라는 뜻이었을 거다. 그때까지도 난 포기하지 못하고 또 다른 병원을 물색하고 있었다. 대답을 하지 않고 시무룩하게 방으로 들어왔다. 하리는 산소방안에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평생 소리를 내지 않았던 조용한 고양이였던 하리가 헥헥 대며 소리를 내 힘겹게 숨을 쉬고 있다. 이별이 다가오는 소리였다.

이전 09화 편도티켓의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