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더 생각해 보고 디자인 하기
모르긴 해도,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에게 왜 디자인을 하느냐고 물어본다면 대부분 비슷한 답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쓰기 좋고 편리한 물건을 만들겠다거나, 더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들겠다거나,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거나, 아니면 세상을 구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런 생각까지는 안 해 봤더라도, 최소한 나쁜 디자인을 ㄷ만들어서 우리 사는 세상을 더 나쁘게 만들겠다는 디자이너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는 왜 디자인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거기에 대한 명쾌한 답이 없다면 설사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더라도 좋지 않은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Saul Bass의 다큐멘터리 Why Man Creates (인간은 왜 창조하는가) 포스터를 보노라면 Why I Design이라는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하게 됩니다. 그저 디자인하는 것만이 디자인을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이 아니라면 디자인 안 하는 게 더 낫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으로 디자이너들이 가지는 좋은 의도를 한번 들여다보고 이 좋은 의도들이 어떻게 잘못될 수도 있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더 아름다운 물건 만들기
잘 된 디자인은 아름답습니다. 건축가인 루이스 설리반 Louis Sullivan은 "Form follows function", 즉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또는 따라야 한다)라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헌법 1조 1항과도 같이 여기는 이 문구는 그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그 전까지의 건축물들이 기능과는 별로 상관없는 아름다움에 빠져있었던 것을 책망하는 의도였다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디자이너들이 너무 기계적인 관점으로, 또 좁은 시각으로 물건의 모양을 만들도록 한 부작용도 있습니다.
같은 건축가인 버크민스터 풀러 Buckminster Fuller는 "When I am working on a problem, I never think about beauty. I think only how to solve the problem. But when I have finished, if the solution is not beautiful, I know it is wrong."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작업을 할 때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문제의 해결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결과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라고 하면서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기능에 우선한 설리반과는 달리 기능과 아름다움의 이유 있는 조합을 중시한 겁니다.
또 예전 남진이 부른 노래에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라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남자들이 흔히 예쁜 여자에 쉽게 마음을 뺏기지만, 마음이 고운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이것을 디자인에 옮겨보면 아름다운 만큼 기능도 중요하다는 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말의 앞뒤 순서를 바꿔보면 기능이 좋아야 하는 만큼 아름다움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제품의 개발에 관여하는 여러 전문가들 가운데 아름다움을 책임지는 것은 디자이너들밖에 없으니 디자이너들에게 있어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드는 것은 천명 같은 겁니다. 제대로 아름다운 물건은 그 물건을 사용할 때, 그리고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는데, 모양을 내기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하는 일이 종종 생기니,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저 눈길을 끌기 위한 방편으로 아름다움을 이용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제가 쓴 디자인의 포르노도 그런 점을 염려한 글입니다.
https://brunch.co.kr/@sooshinchoi/22
이를 잘 설명해 주는 예전 속담과 표현 세 가지를 들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같은 내용물로 만들어 같은 맛을 내는 송편도 가능한 한 예쁘게 빚으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디자인을 하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이상적인 디자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난감이나 장식적인 요소가 강한 제품이 아닌 경우에도 아름다움은 중요합니다.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시각적, 촉각적 만족감은 심리적 만족감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빛 좋은 개살구'인데, 내용은 없으면서 모양만 번지르르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위의 디자인의 포르노에 설명했듯이, 자동차에 스포티 한 느낌을 주려고 막혀있는 가짜 에어 인테이크를 만들어 넣는 것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 번째는 속된 말로 '예쁜 여자가 얼굴값 한다'는 말인데, 아름다운 모양을 내려하다가 속을 썩이는 디자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만들다 보면 원가가 올라가는 일이 허다합니다. 따라서 필요한 이상으로 가격을 올리면서 아름답게 만든 것은 문자 그대로 '얼굴값'을 하는 거지요. 그 정도면 그나마 봐 줄만 합니다. 너무 비싸면 안 팔릴 테니까.
더 나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자동차의 알루미늄 휘일은 알루미늄의 냉각 성능이 좋기 때문에 브레이크에 발생하는 열을 빨리 식혀주는 장점이 있는 반면, 가격이 높습니다. 철제 휘일은 알루미늄보다 가격이 낮은 반면에 냉각 성능은 떨어지고, 가공 방법에도 제한이 많아서 예쁘게 만들기도 어렵습니다. 기러다보니 철제 휘일을 장착한 덜 비싼 자동차에는 예쁘게 보이는 것 외에는 다른 기능이 없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휘일 커버를 달아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의 외형을 예쁘게 만들어주니까 시각적인 만족감을 줄지 몰라도, 이 휘일 커버 때문에 가뜩이나 좋지 않은 브레이크 냉각 성능이 더 떨어지게 되고, 냉각 성능이 떨어지면 제동거리가 더 길어질 수도 있어서 안전에도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심각합니다. 게다가 휘일 커버가 충격으로 떨어져 나가서 다른 차에 부딪히는 경우도 생기니 최악이지요.
어떤 디자인 사상가들은 장식은 죄악 즉, ornamentation is evil이라고 해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혐오하기도 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수도승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움, 즐거움, 매력 같은 것들을 돌 보듯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디자인하는 물건이 아름다워지는 바람에 잃어버리는 건 없는지 생각해 보는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습니다.
2. 더 편리한 물건 만들기
더 불편한 물건을 만들려는 디자이너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 편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을 만들기 위해서 디자이너들은 많은 공부를 합니다. 인간공학과 재료와 가공 같은 엔지니어링 지식도 익혀서 더 쓰기 편리한 물건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중요한 점은 편리하게 사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디자이너들은 대개 직관적이어서 (intuitive) 설명 없이도 사용할 수 있고, 적은 힘을 필요로 해서 (need less effort) 힘이 덜 드는 물건, 그리고 자동 기능이 많은 물건, 스마트한 물건, 별 준비 없이도 바로 쓸 수 있는 (instant) 물건 등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엔지니어링, 마케팅 등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한 일을 합니다. 이런 편리한 물건들을 마다할 사용자들도 없으니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거지요.
하지만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듯,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대개 같이 온다는 게 문제입니다. 편리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거든요. 영어 속담에도 easy come, easy go, 즉 쉽게 가지게 된 것들은 쉽게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로 돈에 대해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른 경우에도 종종 적용됩니다.
일반인들이 제대로 된 해상도의 디지털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10년 정도입니다. 그 전의 디지털 사진은 아주 고가의 장비가 아니면 못 봐줄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요.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때에는 한 장, 한 장을 아주 집중해서 찍었습니다. 필름 한 통에 24장 또는 많아야 36장 밖에 못 찍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찍은 사진은 앨범에 고이 넣어서 두고두고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손톱보다 작은 메모리 카드에 수 만장의 고해상도 사진을 편리하게 찍고 인쇄할 수 있게 된 지금은 대충 찍고, 대충 보고, 대충 어딘가에 보관해 둡니다. 엄청나게 편리해진 만큼 사진 한 장의 가치는 엄청나게 떨어진 거지요.
한국에서는 수동 변속기가 달린 자동차 - 제가 디자인한 기아 세피아 - 를 타고 다니다가 미국으로 건너온 다음부터는 자동 변속기, 자동 크루즈 컨트롤 등이 달린 Isuzu Vehicross를 타고 다니게 되었었습니다. 이 차는 1999년에 만들어진 거라서 오래된 차지요. 얼마 전에 어떤 이를 태우고 식당에 가서 길가에 후진으로 주차 parallel parking을 하는데, 이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주차를 잘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제가 후진 주차를 잘 하기는 하지만, 대부분 다 잘하지 않나요? 한데 이 친구는 한참 전부터 자동 주차 기능이 있는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본인의 '주차 능력'이 없어진 겁니다. 하긴 저도 미국에 온 후 10년쯤 되었을 때에 독일에 출장을 갔다가 렌트한 자동차가 수동 변속기여서 한 5분 정도 클러치를 연습했어야 했으니까 '수동 변속기 작동 능력'이 많이 없어진 거지요. 자동 주행 차량들이 좀 더 보편화되다 보면 '운전 능력'이 없어진 사람들이 많아질 겁니다. 기술이 진보하는 만큼 인류는 퇴보한다고 말하면 좀 심하게 들릴까요?
미국의 슈퍼마켓에 손님들이 직접 스캔하고 지불하는 자율 계산대가 만들어진지 오래입니다. 심지어 아마존은 이런 계산대 마저 없앤 슈퍼마켓을 만들었고, 조만간 많은 슈퍼마켓들이 이런 형태로 바뀌겠지요. 기업으로서는 인건비를 줄일 수 있고, 직원 관리에 들어가는 노력도 줄이고, 또 고객들은 계산을 더 빨리 한다(고 착각을 하게 만든 거지만)고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얼핏 윈윈이라고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 반대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잠깐씩이나마 '인간' 계산원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따뜻한 경험이 사라진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손실입니다.
이런 편리함을 원하는 추세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이런 겁니다. 스마트 폰이 우리의 삶을 더 스마트하게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정작 우리들은 덜 스마트 해지는 거거든요. 페이스북이 훨씬 많은 'friend'들을 만들어 주지만, 대부분의 facebook 친구들은 사실 친구가 아니기도 하고요.
편리한 물건을 디자인을 할 때, 그 편리함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을 돌아보는 디자이너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3. 더 잘 팔리는 물건 만들기
대부분의 디자이너는 더 잘 팔리는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디자인을 하는 대상물이 판매를 (또는 임대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이 제품을 개발하는 목적이 매출 (임대) 이익을 만들기 위한 거니까, 그 제품의 개발을 담당하는 디자이너나 엔지니어 등 모든 사람들의 목적은 더 잘 팔리는 물건일 수밖에 없지요. 당연한 일이고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다 판매를 하는데 디자인이 활용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필요 없는 판매, 필요 없는 소비, 즉 낭비를 유도하는 디자인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미국에서 살면서 특히 이런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 사면 하나 더 주는 Buy One Get One Free는 일상적인 것이 되어서 BOGO라고 줄여서 부를 정도입니다. 0.99달러 전략, 즉 5불 가격을 4.99로 매겨서 훨씬 싸게 보이도록 만들어서 구매를 일으키는 것은 그렇게 안 하는 스토어가 없을 정도로 보편적이 된 지 오래되었지요. 여러 해 써도 문제가 없을 물건들 - 예를 들면 스마트폰 - 을 일 년이 안되어 구식으로 보이게 해서 결국은 멀쩡한 물건들을 두고 또 사게 만드는 것 등, 수많은 마케팅 전략이 개발되고, 디자이너들은 어쩔 수 없이, 혹은 덩달아 이 전략에 맞는 물건을 만드는데 모든 노력을 다 하게 됩니다.
하나가 필요한데도 여러 개를 사야 하도록 만들어진 포장 때문에 여러 배로 낭비하게 되는 물건들은 위의 것들에 비하면 '얌전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지우개가 하나 필요해서 문구점에 가면 적어도 세 개가 같이 들어있는 포장을 사야 합니다. 남은 두 개를 서랍 어딘가에 두게 되는데, 정작 나중에 필요할 때는 이렇게 둔 지우개를 못 찾게 되니까 결국 또 여러 개를 또 사야 하게 됩니다 (나만 그럴 수도 있긴 하네요).
어떤 이들은 좋은 디자인을 많이 팔리는 디자인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Good business is good design이라는 식입니다. 일견 맞는 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물건이 잘 팔리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고, 또 형편없는 디자인도 얼마든지 잘 팔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잘 팔린다고 좋은 디자인이라고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좋은 디자인이라면 물론 잘 팔려야 합니다. 좋은 디자인인데 안 팔린다면 어딘가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지요. 디자인 상을 받은 제품들 가운데 실제로는 실패한 물건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좋은 디자인이 아니었던 거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디자인을 통한 혜택도 주고, 기업에도 도움이 되는, 그런 잘 팔리는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많이 팔기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는 그런 디자이너들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4. 더 착한 물건 만들기
많은 디자이너들은 착한 디자인 - 친환경적인 디자인 (eco-friendly design), 지속 가능한 디자인 (sustainable design), 소외된 많은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 (design for the other 90%), 포용하는 디자인 (inclusive design) - 등을 중요하게 여기고 또 그런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이런 디자이너들이 일하는 기업들은 별로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좋은 디자인들은 대개 돈이 더 들기 때문에 가격이 올라가게 되니 덜 팔리게 되고, 따라서 기업에게 전혀 도움이 되기 않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대 기업에는 sustainable design을 담당하는 중역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sustainable design을 추구하기 위해서 기업의 이윤을 포기하지는 않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무런 결과가 없습니다.
종이 기저귀가 기업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P&G에도 sustainable 담당 부사장이 있지만, 친환경적인 종이 기저귀를 개발했다거나 종이 기저귀 판매를 줄인다든가 하는 소리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월마트 같은 대형 기업이 포장을 줄인다든가, 최근 스타벅스 같은 대형 음료기업이 플라스틱 스트로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의 노력이 없는 것은 아니고, 이런 일들이 더 친환경적인 미래를 만드는 걸음이기 때문에 고무적인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 영향은 전체 기업 규모와 비교할 때 하지만 전체 산업을 보면 이러한 노력은 아주 미미한 수준입니다. 시쳇말로 새발의 피만큼도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리사이클링이 가능한 재료를 사용하거나 리사이클 한 재료를 사용하면 친환경 디자인이나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끝낸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것도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닙니다. 수년전 미국에서 쓰레기가 어디로 이동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 프로젝트에서 미국 북서부 끝인 워싱턴 주에서 수거한 쓰레기가 재활용을 위해서 이동하는 거리를 추적했는데, 어떤 것은 대각선으로 정반대인 플로리다주 까지 이동했다는 것을 발견했읍니다.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라 해도, 재활용을 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 - 수거, 이동, 분류, 파쇄, 원료로 가공, 다시 이동 - 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처럼 되는 경우는 허다합니다.
좀 역설적으로 또는 자조적으로 들리겠지만 정말로 환경을 생각한다면 아예 새로운 물건을 개발하는 것을 그만두는게 낫지 않나 생각을 하게 되지만, 물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만들 수는 없지요. 따라서 착한 디자인이 사람들과 환경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기업에게도 좋은 제품이 될 수 있도록 디자인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디자이너가 물건만 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퍼스펙티브 (여기서 퍼스펙티브란 투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는 시각을 말하는 겁니다)를 가져야 합니다. 디자이너의 진짜 실력은 이런데서 나타납니다.
가구 업계의 이노베이터라 할 수 있는 Herman Miller는 그전의 의자들에 널리 사용되던 스펀지와 봉제 천을 과감히 없애버리고 메쉬 천을 플라스틱 프레임에 바로 끼워 버린 유니크한 디자인과 설계의 Aeron을 개발하여 의자 디자인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메쉬를 사용했으므로 통기가 잘되어 더운 여름에도 땀이 차지 않고, 접착제를 사용한 봉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폐기를 위한 분해를 하기도 쉽습니다. 물론 분해된 의자는 부품 별로 완전히 리사이클이 됩니다. 리사이클이 가능한 부품이 94% 라고 합니다.
Aeron의자는 꽤 비싼 의자였지만, 발표되자마자 그야말로 '대박'을 칩니다. 수많은 의자 회사들이 앞다투어 메쉬의자를 개발하게 만드는 역할도 했습니다. 1994년 발표된지 25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베스트셀러입니다. 2016년 현재 7백만 개가 생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효자 제품인 거지요. 착한 디자인도 성공할 수 있다는 좋은 사례를 보여줍니다.
5. 문제를 해결하는 디자인하기
많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의 기본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또 많은 디자이들은 디자인의 기본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발견되지 못한 문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주어진 문제만 해결하는 수동적인 자세보다는 훨씬 더 능동적이기도 합니다. 예전보다 디자이너들이 더 능동적으로, 더 합리적으로 디자인을 대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문제라는 것들이 원래 잘 보이지도 않고 잘 해결되지도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디자이너들은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위에 열거한 아름다운, 편리한, 착한, 그리고 잘 팔리는, 그런 디자인을 만들려고 하지만, 뜻대로 안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개는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동시에 열 개 정도의 문제를 새로 만들게 되곤 하지요.
뜨거운 커피를 종이컵에 담으면 너무 뜨거워서 위험하니까 스티로폼을 종이컵에 코팅한 컵이 한동안 유행했었습니다. 뜨거운 컵을 드는 문제는 해결했지만, 동시에 재활용이 불가능한 컵이 되어버린 겁니다.
예전의 칫솔은 대개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폴리프로필렌을 사출 가공으로 만든 손잡이에 나일론 재질의 칫솔 모가 박혀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런 칫솔의 문제점은 양치질하는 손이 젖으면 손잡이가 미끄러워져서 잡기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이 문제를 많은 디자이너들이 해결하기 위해서 처음에는 미끄럽지 않도록 손잡이 표면에 돌기를 만들고 또 손에 잘 잡히는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좋은 디자인적인 해결입니다.
한데 더 나은 칫솔을 만들기 위해 단단한 폴리프로필렌과 부드러운 폴리우레탄을 다중 사출 공법을 사용해서 만든 손잡이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형태의 칫솔이 손에 더 잘 잡히기도 하고 또 여러 색상을 사용했기때문에 더 예쁘게 보이기도 해서 잘 팔리기 시작하니까 너도나도 따라하기 시작해서 요즈음 시중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칫솔은 이런 다중 재질의 칫솔입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입니다. 그 엄청난 양의 칫솔이 한 두 달 사용된 뒤에는 버려지는데 전혀 다른 성격의 재질을 같이 사용한 바람에 리사이클이 되지 않느다는 점입니다.
안타깝게도 작은 솔루션 solution을 만들려다가 되려 큰 폴루션 pollution을 만든 셈입니다.
물론 칫솔의 수명을 길게 하기 위해서 칫솔 머리 부분만 교체할 수 있는 것을 만들기도 하고, 한 가지 재료만으로 더 사용하기 편한 디자인을 개발하기도 합니다. 어느 학교의 디자인 학생은 칫솔 자루와 칫솔 모를 같은 재료로 만들어서 리사이클링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디자인을 제안한 것도 보았습니다. 이런 의식 있는 디자이너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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