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5일 금요일,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수업을 마친 후 일찍 조퇴를 했다. 11월 27일은 아들 생일, 28일은 내 생일이다. 세 식구가 같이 한 끼 식사를 하려고 주말에 모인다. 생일축하다. 강아지도 온다.
아들은 학교에 일이 있어서 토요일에 온다. 강릉에서 기차로 서울까지 2시간 걸린다. 제주도에서 김포공항까지 2시간 30분, 비행기가 지연되어 20분 더 추가됐다. 비행시간은 1시간 정도인데, 탑승하기까지 1시간 이상 걸린다. 왕복 항공 요금이 어느 때는 거의 20만 원 정도다. 미리 예약을 할 경우, 10만 원 이하일 때도 있다. 이번에는 20만 원 정도 들었다. 모임 날짜를 갑자기 바꾸는 바람에 뒤늦게 변경하니 비싼 표밖에 없다. 내 실수로 만나는 날짜를 잘못 알아서 생긴 일이다.
토요일 저녁식사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는 것부터 서로의 의견이 다르다. 아들은 식사 후에 김포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중고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다. 학생 때 집에 놀러 와서 잠도 자고 갔다. 결혼한 친구다. 돌 지난 아기도 있다. 아들은 가족식사를 마치고 바로 그 친구 집에 가기로 했다. 식사를 5시에 하기로 했다. 남편은 더 늦게 먹고 싶어 했지만 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평소에는 가족 식사를 위한 음식점 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 이번에는, 음식점도 남편이 양보한 분위기다.
아들은 중형견을 돌본다. 미소는 아들이 돌보는 강아지 이름이다. 남편은 미소도 식사자리에 같이 있게 하려고 애썼다. 애견동반 식당을 미리 검색하여 가족 카톡방에 올려놓았다. 그것들 중에 베트남 음식점도 있었다. 남편이 가고 싶어 하는 삼겹살구이, 김치찌개, 감자탕, 이런 음식점은 애견 동반이 거의 안된다. 남편은 베트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미소를 위해 음식점 선택 대상지 중 하나로 올려놓았다. 우리는 베트남 음식점에 갔다. 남편은 종업원에게 반찬이 이것뿐이냐고 묻는다. 무조림, 그 외에 반찬이 없다. 한국 음식점에서 나오는 반찬을 기대하며 묻는 말이다. 남편이 종업원에게 불만을 표현할까 봐 긴장되는 순간, 남편은 웃으면서 먹던 음식을 맛있다며 먹는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튀김 요리, 아들도 나도 남편도 모두 같은 표정이다. 맛있어하는 표정.
남편이 식사자리에서 술을 마시지 않은 기적의 날이다. 자녀들이 중고등학생 때, 15년 전쯤까지의 일이 생각난다. 형제들 식사 모임, 술이 빠지지 않는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불안했다. 음주운전자, 남편은 술 취한 상태로 운전석에 앉는다. 내가 운전한다고, 술을 마셔서 위험하다고, 술 취한 남편에게 말하는 나. 그 말에 더 험악한 표정과 목소리로 위협하듯이, 빨리 차에 타라고 말하는 남편. 안된다고, 아이들과 나는 택시 타고 가겠다고, 죽기 싫다고, 저항하는 나. 어떤 두려움에서인지 결국 음주운전자의 차에 타고 만다. 차를 타고 집에 가는 내내,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일, 그 일이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가끔 떠올려지며 공포감을 느낀다. 이런 현상을 트라우마라고 하는 걸까? 오늘은 식탁에 술도 없었다.
식사를 하러 올 때부터 내리던 비가 계속 온다. 아들이 김포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 그 버스 배차 시간이 40분이다. 한 대를 놓치면 40분을 기다려야 한다. 아들이 기차를 타고 올라왔기에 남편이 승용차를 운전했다. 강서구 마곡에서 등촌동까지 급하게 운전한다. 김포에 가는 버스 도착 시각, 그 시각 전에 정류장에 가야 한다. 비도 오고 주말 저녁이라 그런지, 강서구청 사거리 교통 상황은 얽힌 그물처럼 복잡하다. 그 길을 통과하여 정류장에 이르니 버스가 앞서 출발한다. 아들은 40분 더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면 된다고 내리겠다고 한다. 김포 친구집까지 버스로 한 시간 거리다. 승용차 안, 밖은 비가 온다. "우리 다 같이 다녀오면 어때? " 내가 말하자, 남편도 맞장구친다. 그러자고. 남편의 뜻밖의 말에, 아들은 놀람과 동시에 어린아이가 된다. 비 오는 저녁, 돌연 가족 김포 나들이다. 아빠가 아들을 친구 집에 데려다준다. 아들이 어릴 적에도 한 번도 없던 일이다. 남편은 자녀들이 어릴 적에 바쁜 아빠로 살았다. 주말과 휴일은, 거의 나와 두 아이와의 나들이였다. 더군다나, 아들과 나를 대할 때는 냉정하고도 부정적인 말과 짜증 섞인 말투이기에, 함께 어디 가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이 순간은 남편이 아들과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 같다. 한강변을 달리는 승용차 안, 남편은 음악을 튼다. 아들이 좋아할 만한 분위기의 노래다. 우리에게 이런 날이 언제 있었던가?! 술 없는 식사자리, 불만 없는 식사자리, 아들을 위한 밤운전. 이 모습이 그전부터 있었더라면, 성장하는 동안 아들 딸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우리 가족 한 끼 식사 자리, 가랑비 맞은 잔디처럼 촉촉한 여운이 남는다. 지금까지 눌려있던 트라우마가 지워지게 될까? 강아지가 처음 서울집에 왔을 때, 강아지 털이 날린다고, 인상 쓰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던 남편이다. 그 강아지가 식사자리에 함께 있어야 한다며 먼저 애견동반 식당을 알아본 남편이다.
우리 가족은 변하고 있나 보다. 아들도, 남편도, 나도, 멀리 미국에 있는 딸도, 마음이 한 뼘 더 자란다. 강아지 미소가 있어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