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했다가
웃었다가
울었다가
감정이 퐁당퐁당 인 아이가 있다.
나와 주변 아이들은 그 아이로 인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바로 웃다가, 다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며 소리 지르거나 우는 아이, 이런 아이는 저학년뿐만 아니라 고학년에도 있었다.
체육시간에 학급 아이들 모두 참여하는 피구경기를 했다. 이제 몇 개월만 지나면 중학생으로 진급할 6학년 아이들이었다. 축구도 잘하고, 피구도 잘하고, 달리기도 잘하는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대결하는 피구경기였다. 경기를 하기 전에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어기면 구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남자아이 중에는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사춘기여서였을까? 피구 경기장 안에서 공을 던져 다른 팀 아이를 맞추었을 때는 큰 소리로 웃으며 더욱 공을 세게 던졌다. 상대팀 아이가 던진 공에 자신이 맞자, 얼굴 표정과 몸짓이 거칠게 돌변했다. 경기장 밖으로 나가며 온몸을 휘둘렀다. 짜증 난다며 두 발로 땅을 구르고 주먹을 내저으며 주변을 위협하듯 했다. 밖으로 나가서는 경기장 안에 있는 다른 팀 아이를 맞추기 위해 씩씩거리며 이리저리 달려 다녔다. 그 아이가 던진 공에 상대방 팀 아이가 맞자,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맞은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달려들어 싸울 기세였다. 나는 경기를 잠시 멈추게 했다.
“얘들아, 약속하자. 너희들이 비난하는 말이나, 거친 말투 사용하지 않기로. 괜찮아,라는 말이나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그렇지 않으면 피구 게임 중단할게요.”
이렇게 말했는데도 거친 두 남자아이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지 않았다.
경기가 너무 거칠게 진행이 되어서 나는 경기를 중단시켰다. 잠시 함께 생각해 보자고 했다. 우리가 학급 친구들과 체육시간에 게임을 하는 목적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스포츠 정신에 대해서도 물었다.
“체육활동을 할 때 모두가 즐거운 시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해야 하는데, 지금 이 모습은 정반대 모습이란다. 이기려는 욕심만 가득 차서 다른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어요. 다른 팀을 비난하면서 기분 나쁘게 하는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경기를 중단시키게 한 아이가 소리 지르며 말했다.
“왜, 경기 안 해요. 시간 다 가잖아요.”
이 아이의 말에 호응하는 아이 한 명이 똑같이 큰 소리로 말했다. 체육 시간 다 간다고, 빨리 게임하자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 상황에서 경기를 할 수 없다고.
이 모습을 보고 다른 아이들은 이 두 아이를 원망하는 말을 했다. 너희 때문에 피구 못하게 됐다고, 속상하다고. 그러자, 그 두 아이는 나를 원망하는 말을 하며 울었다. 나 때문에 다 망했다고.
교실로 들어온 후, 그 두 아이는 나를 경계하는 듯 행동했다.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40대 초반이었던 나는, 학급 아이들이 마치 내 자녀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그날 점심시간이었다. 그 두 아이는 운동장에서 다른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다. 축구를 하면서도 상대방 아이에게 화내듯이 말했다가 다시 웃었다가, 욱했다가 웃었다가, 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 두 아이의 생활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이번 창체 시간에는 감정에 대해 공부할 거예요.”
다행히 그날 5교시가 창체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감정에 대해 공부하자고 했다. 1시간 동안 다양한 감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화’에 대한 감정에 대해 알아볼 때에는 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했다. ‘화’라는 감정은 잘못된 감정이 아니라고, 다만 화가 났을 때, 어떻게 다스리는지가 중요하다고.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자신도 소중한 친구들을 잃게 될 수도 있다고. 그 ‘화’를 폭력적인 말고 행동이나, 비난하고 조롱하는 말과 행동으로 나타낼 때, 그런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가까이하지 않으려 할 거라고, 결국 자신과 비숫한 사람들과만 친구가 될 거라고. 1시간 활동이 부족했다. 아이들은 더 많은 시간을 감정에 대해 활동하고 싶어 했다. 1시간을 더 할애하여 충분한 대화를 나누도록 했다. 역할극 대본을 보고, 모둠 친구들끼리 ‘화’라는 감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어내는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체육 시간에 있었던 피구경기 장면이 아이들의 웃는 모습으로 덮였다. 두 아이에 대해 힘들었던 마음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도 두 아이의 감정은 들쭉 날쭉하곤 했다. 하지만 그 빈도는 점점 줄어들었다. 몇 주가 지나고, 두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두 아이는 학급을 위해 봉사할 것들이 있으면 맡겨달라고 했다. 나와 학급 친구들에게 미안했던 걸까? 학급 쓰레기도 버렸고, 분리수거통도 비웠다. 쓰레기통이 지저분하다며 깨끗이 닦기도 했다. 나를 피하려던 모습이 점점 사라져 갔다.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점점 편해져 갔다. 두 아이가 달라지기까지 나는 잠잠히 기다려 주었다. 두 아이가 잘못된 행동을 하면 여전히 두 아이에게 상냥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우연히 지나칠 때면, 아니, 일부러 지나쳐 가며 말해 주었다.
“지석아, 넌 운동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열정적인 멋진 아이야.”
“정수야, 책 읽고 독후감 쓴 내용 읽었는데, 네 생활에 적용을 잘했더라.”
처음에는 머쓱한 지, 표정도 분명하지 않았다. 점차 내가 말을 해줄 때 그 말을 인정하는 환한 표정이 되었다. 아이들은 감정을 빨리 추스른다. 싸웠다가 금세 웃고, 울다가 다시 괜찮아진다. 그 힘 역시 아이들이기에 가능한 일인 듯하다.
늘 평온한 아이도 있다. 눈빛도 표정도 몸놀림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런 아이들의 말은 차분하다. 상대방의 마음이나 상황을 살피는 힘이 있다. 나는 학급 아이들에게 글을 쓰는 시간을 자주 준다. 학년이 끝나갈 즈음, 아이들은 달라져 있다. 자신의 감정을 말과 글로 표현하며 자신을 토닥인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며 나는 뿌듯해진다.
나는 내 솔직한 감정을 읽지 못했었다. 어린 시절 성장하며 들었던 어른들의 말 때문이었을까? 힘들다고도, 아프다고도, 슬프다고도, 어렵다고도, 거의 표현한 적이 없는 듯하다. 부모님 앞에서 그런 표정은 보이지 않았어야 했다. 그런 감정은 나에게 있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없는 척 숨기며 살았다. 나와 만나는 사람 앞에서는 항상 괜찮은 척, 기쁜 척, 다 해낼 수 있는 척했다. 그러다 혼자 슬퍼하고 억울해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었을 때 내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기도 했다. 갑자기 화가 폭발하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서 30년 넘게 아이들과 함께 감정에 대해 공부하며 내 감정도 다스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