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잃어버린 관계에 대한 슬픔. 받았어야 마땅했으나 받지 못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애통함.
어쩌면 인간의 심적 고통이란, 잃어버린 것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데서 생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심리적 경험을 5단계[부인-분노-타협-우울-수용]로 정의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이렇게 썼다.
“슬픔은 깨져버린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슬픔은 치유를 향한 감정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여행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대부분 자기 자신이 충분히 슬퍼하도록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 <On Grief and Grieving>(한국어 번역판 제목:상실수업) 중에서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데이비드 케슬러
이제는 안다. 애당초 내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충분한 슬픔’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2011. 2012.
나는 충분히 슬퍼했던가.
꽤 오랫동안은, 많이 울었으나 충분히 슬퍼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제대로 슬퍼했다.
충분히 슬퍼하면 눈물은 오히려 잦아들기도 한다.
눈물의 폭풍우가 잦아든 고요한 풍경 속에서 나는 슬픔을 천천히 되새김질했다. 그것을 잘 바라보고,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나라는 한 유기체의 본연의 감정과 감각들이 살아나는 걸 경험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죽은 내 고양이에 대한 애도의 감정은 줄어들지 않음을, 그 감정의 농도가 옅어지지도 않음을 알아차린다. 상실감으로 인한 격한 생리적, 신체적 반응들이 줄어들었을 뿐, 이와 관련된 정서는 오히려 풍부해지고 민감해짐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나는 예전보다 더 잘 슬퍼하고 더 눈물이 많아졌다.
그 어떤 슬픈 영화보다 매일 접하는 사회면 뉴스들에 더 큰 슬픔을 느낀다. 일면식도 없는 어느 웹툰 작가의 늙은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길을 걷다 툭 눈물을 떨군다.
마치 세상의 고통을 감지하는 보이지 않는 감각기관이 온몸의 피부에 돋아난 양, 나는 타인들의 고통에 민감해졌다.
2013. 2014.
흉포하거나 안타까운 사건의 피해자들, 학대당한 아이들, 약자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누군가에 대해, 그들이 받았어야 마땅했으나 받지 못한 보호와 안전과 돌봄에 대해 애도한다.
기상천외하리만큼 끔찍한 방식으로 학대당하는 동물들, 공장식 축산업의 농장동물과 실험동물, 번식공장의 동물, 천대당하는 길 위의 동물, 유기된 동물, 악의적으로 이용당하다 버려진 동물, 인간이 만든 쓰레기와 오염 때문에 죽어간, 죽어갈 동물, 받지 말았어야 마땅했으나 오로지 인간에 의해 불필요한 고통을 받은 (인간 자신을 포함한) 그 모든 생명들에 대해 애도하고, 추모한다.
이 모든 존재들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숨 쉬는 공기처럼, 때로 고압 전기처럼 강렬하게 느낀다.
감정이라기보다 격통에 가까운 슬픔과 분노. 그 밑엔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잃어버린 존재들에 대한 깊디깊은 연민이, 그리고 신이 되어 전지전능하게 그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무력감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러므로 나의 애도는 떠난 내 고양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이 모든 고통을 스스로 창조하길 절대 그친 적이 없는, 이 행성 위에서 지금은 번성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자멸하게 될 인간 종족에 대해서도 애도한다.
2015. 2016.
펫로스 이후 선사받은 아홉 번째 선물은 바로 애도하는 마음, 그 자체인 것 같다.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나 한때 엄연히 존재했던 한 생명, 그 생명을 품었던 나라는 존재와, 내가 살았던 한 시절, 그 시절동안 내가 빚을 진 많은 존재들을 마음 깊이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