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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피아 Apr 13. 2021

이상하고 아름다운 알바 생활

세상에 다시 첫걸음을 내딛다.- 엄마의 알바

오랫동안 일을 쉬다 보면 현실감각이 무뎌진다는 걸 잊었다.

합격 전화를 받고 꿈에 부풀어 다가올 앞날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한 달 급여부터 계산해본다.

그리고 그 꿈은 점점 커져 마음속에서는 벌써 오래된 가전을 바꿨고, 가구를 새로 드렸고, 집도 고쳤다.

꿈에 부풀어 설레는 마음을 가득 담아 첫 출근을 한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

분명 사무보조라고 알고 있었는데, 무슨 프로젝트를 한다고 한다.

대표님이 엄마들의 이력서를 쭉 훑어보시더니 이렇게 아까운 인재들을 썩힐 수 없다며, 연구원 한 명, 엔지니어 한 명, 마케팅 한 명으로 구성된 한 팀을 만들기로 하셨다고 한다. 나는 마케팅 담당이었다. (경영학과 출신에 바이럴 알바 경험이 더해져서 ㅡㅡ;;;)

대표님의 설명을 듣고 참신한 아이디어에 공감했으나, 당장 모여있는 건 집에서 살림하다 10년 만에 나온 아줌마 셋이었다. 게다가 계약직이나 정규직도 아닌 파트타임 알바였는데, 우리가 갑자기 그 프로젝트를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건지 막막했다.

결국 한 명은 그만두었고, 나와 엔지니어 둘만 남았는데,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시작해야 했으니 사무실에 앉아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냥 사무보조일을 달라고 했어야 하는데 왜 그 말을 못 하고 남아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대표님이 상상하셨던 그림과 우리가 점점 멀어져 가자 3개월 쯤되서 결국 프로젝트는 보류되었는데 엔지니어가 사무 보조한다고 왔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다며 잠수를 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 혼자 남았다. 어쩌지?

조용히 일을 시작했으면 그만둘 텐데, 온 가족이 다 알게 떠들썩하게 일을 시작했으니 쉽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때 그만뒀어야 했는데, 결국 정체성 없는 이상한 알바 생활이 시작되었다.



운이 좋았던 걸까? 팀장이 나를 잘 봤나 보다. 내 또래였는데 그분은 나처럼 육아를 하다가 워킹맘이 되려고 취업을 했고, 나는 아르바이트생으로 같은 듯 다른 첫발을 내디뎠다. 비슷한 또래에 통하는 것도 있어서였는지 나의 잃어버린 정체성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를 딱히 여겨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줬다. 그래서 마케팅 업무비율은 10%로 줄이고 매달 필요한 자료 정리 업무를 새로 받았다. 그 일은 다 좋았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월 초에는 매우 한가하다가 말 일쯤에 일이 몰리다 보니 그 주에는 초과근무를 해야 했는데, 아이 하원 시간을 맞춰야만 했던 나는 집에서 자료를 마저 정리해서 보내줘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한 번의 변화가 왔다. 새롭게 생산파트가 추가되었는데 해당 파트에 관련해서 기관에 서류 등록을 하거나 관련 업무를 정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는 일의 수준이 단순 알바가 아니라 탄력근무제를 이용해서 근무를 하는 사원 같은 기분이었다. 대표님이 나를 좋게 봐주셨는지, 세상 밖으로 나오라고 계속 이끌어 주셨다. 좀 더 넓은 세상에서 멋지게 꿈을 펼져보라고 늘 말씀하셨다. 마음은 감사했지만 나는 아이들을 놓칠 수가 없었다.  


대표님은 엄마들이 경단녀가 되어 집에만 갇혀 지내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래서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일할 수 있는 시간으로 잡아서 알바를 구하셨던 것이다. 학교 관련 일을 하는 곳이라 방학 때는 쉬다 보니 아이가 있는 엄마들에게는 최고의 알바였다.

하지만 막상 근무해보니 직원들은 그 시간에 아르바이트생이 오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업무 패턴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요한 시간에 일손은 없고 일 좀 시키려면 시간이 돼서 가버려야 하니 오히려 풀타임으로 오는 아르바이트생들을 더 선호했다. 게다가 아르바이트생들은 방학이 되면 쉬었지만, 직원들은 휴가도 겨우 쓰는 상황이었다.


일을 하다 보니 대외적으로 미팅도 생기고, 출장도 가야 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생 중 유일하게 명함도 만들어 주셨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정직원처럼 일을 하고 알바의 급여를 받는 직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정직원처럼 일을 하면서 그에 따른 책임감을 갖기를 바라셨지만 내 마음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저 그런 고민 없이 정해진 시간에 서류 정리만 하면서 일을 하러 오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점점 나의 위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갑자기 남편이 해고를 당하고 당황스러웠던 나는 당장의 생계를 위해 풀타임으로 직장을 구했어야 했다. 그래도 그동안 일했던 정이 있으니 말이라도 꺼내볼까 싶어서 대표님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처음에는 흔쾌히 정규직으로 전환시켜 주신다고 했는데, 별말씀 없이 몇 주가 흐르고 나서 다시 여쭤보니 회사 사정으로 인해 전환은 어렵고 풀타임 근무로 시간은 조정해 주실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새로 다시 직장을 구하는 것보다 일하는데서 좀 더 있는 게 낫겠다 싶어서 시간을 늘려서 일을 했는데 그게 잘못된 선택이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1년 반 가까이 일하던 그곳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저 돈과 시간에 쫓겨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같은 시간을 투자해도 나를 위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고민이 시작됐고 두 번째 사춘기를 맞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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