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선조의 피란과 조정 내의 분열
조선군의 연이은 패전과 왜군의 맹렬한 북상으로 수도 한양은 풍전등화였습니다. 결국 선조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의주로 파천을 단행했습니다. 왕과 신하들의 피란길은 비탄에 잠겼고 그들의 얼굴에는 깊은 절망감이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선조는 곤경에 처한 신하들 앞에서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며 답을 구할 길이 없음에 괴로워했습니다. 신하들 역시 텅 빈 눈으로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뿐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에서는 국가의 생존 방안을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항복은 명나라로 건너가 재기를 도모하자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는 명나라가 조선을 보호하고 왜군을 막을 최후의 보루라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유성룡은 결코 나라를 버릴 수 없다며 피난 계획에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조선 땅에 남아야 한다고 외치며 선조의 파천 결정마저 비난하는 듯했습니다. 유성룡과 오성은 조정에서 첨예하게 대립했고 서로의 입장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유성룡은 극한의 위기감 속에서 점차 격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는 때로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반면 오성은 냉철함을 유지하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라를 위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전란의 그림자는 단순히 외부의 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조정 내부에는 뿌리 깊은 당파 싸움과 해묵은 분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내홍은 조선의 위기 상황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서로를 불신하고 비방하며 국력을 소모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총체적인 난국 속에서도 오성과 한음은 굳건한 의지와 흔들림 없는 책임감으로 나라의 앞날을 고민하고 자신의 소임을 다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위기 속에서 더욱 빛나는 군자의 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논어에서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즉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송백이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혹독한 전란의 겨울 속에서 많은 이들이 흔들리고 좌절했지만 오성과 한음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변치 않는 기개와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진정한 충정과 지혜가 무엇인지 일깨우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