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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Y Sep 05. 2019

33살의 다이어리

아빠 그리고 기적

지난 8월 27일 아침 9시 수업 전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빠가 많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아빤 오랜 기간 투병생활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퇴행성질환 'MSA'. 원인도 알 수 없는 병. 약도 없는 병을 앓았다.

달리기와 축구를 비롯해 유도, 태권도, 골프, 스쿠버 다이빙 등등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며 잘했던 운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만드는 병에 걸린 것이었다.

아빠의 몸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고장난 듯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에

아일랜드로 떠났다.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며칠 간 병원에서 병간호를 하면서 아빠에게 약속했다.

6개월만 하고 돌아오겠다고. 그 때까지 아빠, 엄마랑 조금만 더 고생해달라고. 돌아와서 내가 파트타임 뛰면서 아빠 간호해주겠다고.


아일랜드에 도착해서

아빠가 몇 차례 병원에 입원했지만 증상 치료를 하고 꽤 회복이 되어 퇴원을 했기에

이번에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엄마와 통화를 하며 엄마를 안심시키려 들었다. "아빠, 괜찮아질 거야. 열만 떨어지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그건 엄마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것이었다.

엄마가 대답했다. "그럴 지도 모르겠네, 그래. 괜찮아질 거 같다." 그런데 전혀 확신이 들지 않는 목소리였다. 나는 겁에 질린 채 물었다. "비행기표 끊을까?"

"아니다. 내일 아침까지 경과보고 의사쌤 오시면 그 때 결정하자. 아빠 나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여기 생각하지 말고 공부하고 있어라."

그리고 나서 수업 도중에 사촌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수업 마치면 연락 좀 줘.

쉬는 시간이 곧이었기에 나는 전화를 걸었다. 언니가 엄마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뭔가 심각한 것 같다고 최대한 비행기표를 빨리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언니의 말을 처음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마가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했는데?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어서 괜찮아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니는 한사코 비행기표를 알아보라고 했다. 표값은 걱정하지 말라고.

나는 그 말을 듣곤 집으로 가서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30일자 비행기표를 사고서 엄마에게 연락했다. "엄마. 30일자 비행기표 샀어. 도착일은 31일 3시쯤이야. 부산에 도착하면 저녁일 거야."

"그래? 샀어? 아빠가 아직도 열이 안 떨어지네. 링거를 맞추고 있는데 일단 내일까지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응. 알겠어."

나는 전화를 끊고 기도를 했다. 매번, 매일하는 기도였다. 아빠를 지켜달라는.


27일이 지나갔고 28일이 왔다. 알람시계는 아침 7시 반에 맞춰져있었지만 불안감에 아일랜드 시각으로 새벽 2시쯤 잠에서 깨어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아직도 아빠는 깨어나질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병실에 지금 목사님이 계신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목사님 전화를 바꿔줬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간밤에 꿈을 꿨는데 아빠가 나왔다는 것이었다. 병실에서 아빠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벌떡 일어나앉아 활짝 웃으며 목사님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안아주는 꿈이었다고 하셨다. 목사님은 그 꿈을 꾸고 새벽기도를 마치시고 병원에 오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나서 컴퓨터를 켜고 비행기표를 더 앞당겼다. 하루 더 앞당겨 29일 더블린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아침에 학교로 가서 3주 휴가 신청을 냈고 비행기티켓 프린트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그러고도 대낮이었다. 이런 상황에도 내가 이 먼 땅에 있다는 사실에 증발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무기력한 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학교 앞 성당 풀밭에 서서 초조한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고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부탁했다. 전화기를 아빠 귀에다가 대달라고. 나는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아빠에게 사랑하며 존경하며 당신이 나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비행기표를 끊었고 내일 출발하면 내일 모레 도착하니까 그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말하는 그 와중에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영이 아빠, 눈 좀 떠봐라. 지영이 이제 온단다. 눈 좀 떠봐라."


집으로 돌아가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도밖에 없었다. 피가 마르는 기분이 어떤 건지 충분히 알고도 남을 만큼 버티며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28일 저녁 무렵부터 엄마는 '영 이상하다, 안 깨어난다.' 라는 말에서 이젠 '의식이 없다.'라는 말로 아빠의 상태를 알렸다. 이어 엄마가 주치의선생님의 말을 전했다. '선생님도 네가 돌아올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신다.'

난 전화를 끊고서 다시 하나님을 찾았다. 다니는 교회에 또한 중보기도를 요청했다.

"제발 제가 한국에 도착해서 아빠를 만날 때까지만이라도 아빠를 버티게 해주세요."


오지 않을 것만 같은 29일이고 왔고 새벽 1시 더블린행 버스를 탔다. 3시간 반 가량을 달려 더블린공항에 도착하니 새벽 4시 반이었다. 비행기는 정확히 1시간 반 후인 6시에 이륙했다. 그리고 두어시간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문제는 지금부터 또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와 아일랜드 사이엔 직항이 없기에 난 샤를르드골공항에서 4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정신이 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불안함에 친구들에게 연락하고 사촌언니들에게 연락하고 또 기도하고 엄마와 동생에게 연락했다. 엄마가 말했다. "문선생님께서 최선을 다한다고 하셨고 지금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 혈액 투석을 할 거야. 그리고 심장은 뛰고 있으니까 만날 수 있을 거야. 이미 일은 이렇게 되었고 너는 어찌되었건 간에 조심히 한국으로 돌아와."

나는 동생에게 또 부탁했다. 내가 녹음하는 카카오톡 음성메시지를 빠짐없이 아빠 귀에 들려주라고. 마지막 메시지에 나는 이렇게 녹음했다. '아빠 너무 힘들어서 혹시 못 버텨서 우리 못만나더라도 천국이 있으니까 우리 천국에서 만나요.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버텨주세요. 사랑해요.'


파리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11시간이 넘는 비행을 했다. 여행하는, 또 집으로 돌아가는 그 행복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 혼자서 지옥에 있었다.


마침내 30일 아침 7시 인천에 도착했고 나는 곧장 김포공항으로 넘어갔다. 김포에서 김해공항으로 넘어갔고 날 픽업해주기로 한 친구를 바로 만나 아빠가 있는 병원으로 출발했다. 차를 타고 차창 너머로 비치는 햇살이 참 따스했다. 마음이 어쩐지 편안하기까지 했다. 도로에 차가 밀리는 듯하면서도 밀리지 않았고 11시 45분쯤 병원에 도착했다. 중환자실이 있는 3층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있는 엄마와 동생을 발견했다. 착찹하기 그지 없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엄마는 내게 아빠가 의식이 없다고 했지만 난 분명 아빠가 내 말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엄마를 보며 이어 말했다. "아빠 앞에서 난 절대로 울지 않을 거야."


30일, 12시 정각, 면회시간이 되었고 병원가운을 입고 손에 소독제를 바르고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니 침상 위에 누워있는 아빠가 보였다. 아빠의 모습은 그동안의 모습과도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엄마가 "지영이 아빠, 지영이 왔네. 눈 좀 떠봐라." 라고 했다.

그런데  말과 동시에 아빠가 눈을 떴다. 나는 엄마를 지나 아빠의 얼굴 앞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고 말했다. 아빠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동안 의식이 없었다던 아빠가 날 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아빠 사랑한다고. 기다려줘서 고맙다고. 이제까지 이 무서운 병을 이기려고 노력해줘서 고맙고 존경한다고. 아빠처럼 강하게 살 거라고. 엄마 잘 모시고 살 테니 걱정마시라고. 우리가족 다 같이 천국에서 꼭 만나자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아빠의 볼에 여러번 입을 맞춰주었다. 아빠의 입에 산소가 들어가는 호스가 있어서 전혀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빠는 내 말마다 눈을 깜빡여주었다.

엄마와 동생은 아빠가 그 이틀 간 눈을 뜨지도 아무런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아빠의 모습에 놀라며 눈물을 터뜨렸다. 엄마가 말했다. "세상에! 이거 기적이다. 지영이 아빠. 이제 살았다. 자기야, 얼른 몸 회복해서 우리 8층 병실로 옮겨가자."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 병실을 나가야만 했지만 난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다시 아빠 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더 하고 볼에 입술을 맞춰주고서 저녁 6시에 다시 면회할 수 있으니 그 때 다시 만나요, 라고 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로부터 1시간 20분정도 후, 아빠는 하나님 곁으로 떠났다.



장례를 다 치르고 발인을 마친 그 날 주치의였던 문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아버지 몸은 이미 29일에 돌아가실 수도 있을만큼 위독한 상태였다고 했다. 선생님이 오전에 찾아갔을 때만해도 아빠는 전혀 반응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기적이에요. 아빠가 딸을 너무 보고 싶어해서 기다려줬나봅니다."




8년이라는 긴 아빠의 투병생활 동안 난 하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했었다.

아빠 병을 정말로 씻은 듯이 낫게 해달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적은 다른 기적이었다.

아빠를 만날 수 있게 해주신 모든 일들, 그 가운데에서도 내가 도착할 때까지 아빠를 버티게 해주신 그 일.


그리고 또한 난 이 일을 통해 진정으로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날 너무나도 사랑해서

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그 가운데에서도 버텨준 아빠의 그 큰 사랑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아빠!















나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고 있다.

이 믿음을 절대로 잃지 않고 천국에 계신 아빠를 만나는 그 날까지

아빠처럼 강하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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