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내내 논문 작업에 매달려 있다가 조금 숨을 돌린 뒤 바로 다음 목표를 찾아 달렸다.
한번 긴장이 풀리면 한없이 늘어질까 봐 두려워하던 차에 마침 공모전이 눈에 띄었다. 한동안 공모전에 낼 원고를 쓰느라 꽤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이른 아침부터 타이머를 켜놓고 글을 썼다.
매일 2~4시간씩 쓰는 규칙적인 글쓰기는 작은 성취감을 주었다. 한꺼번에 욕심을 내서 근 한 달 동안 2개의 단편, 10편의 에세이, 12편의 소설, 기타 습작을 썼다. 다소 무리한 계획이었는데 제때 맞출 수 있어서 나름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제 뭘 하지?
마감이 있는 목표만 단기적으로 보고 달렸더니 그 뒤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대학원에서 세미나 준비도 해야 했고, 좀 더 공부에 신경을 써야 할 때였다. 어찌 보면 글쓰기와 공부의 타이밍이 좋았다. 동시에 했으면 버거웠을 텐데 일정이 겹치지 않아서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매일 글 쓰고 책 읽고 공부하는 생활이 어느 정도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리 쉬울 리가 없지. 한동안 잠잠하던 ‘다 때려치우고 싶어!’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글을 써도 그전만큼 몰입이 되지 않았고, 감정 해소가 되지 않았다. 억지로 꾸역꾸역 글자 수를 채우는 느낌이었다. 다 관두고 좀 쉴까. 나중에 더 큰 후회와 자학으로 이어질 게 뻔하니까 내면의 저항을 뿌리치고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처음 프리랜서가 되었을 때보다 일상을 규칙적으로 유지하기는 하지만 흥이 나지 않았다. 아무런 열정이 없다. 운동하면 스트레스 해소가 되고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때가 많았는데 잡념만 더 생겼다. 이 정도 운동을 해서 살이 빠질까?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자꾸 의심만 깊어졌다.
마감이 있는 글쓰기가 필요해서 공모전에 응모했다. 규칙적인 글쓰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 강제성이 있어야 늘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글먹’ 하고 싶으니까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했다. 나 혼자 매일 쓴다고 해서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남편은 공모전의 후유증을 알기에 안 했으면 하는 눈치였다. 우울의 바닥까지 처박혀서 헤어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걸 옆에서 지켜보기 힘들어했다. 그나마 결과를 빨리 알면 다음으로 넘어갈 텐데 아무리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과 정성을 쏟아놓고 단 1%의 기대도 없다면 거짓말이다.
나는 기대했던 만큼 결과가 좋지 않으면 지금처럼 일상의 글쓰기를 이어갈 수 없을까 두려웠다. 그동안 많은 일을 겪고, 정신분석 공부를 하면서 나름의 감정 정화가 되었기에 평생 읽고 쓰고 공부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다짐이 정리된 상태였다. 그랬기에 다시 도전할 결심을 했다. 예전보다 덜 타격받고, 잘 관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마감이 있는 목표는 일상이 흐트러지지 않게 해 주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의 불확실함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 불안함을 없애려고 그다음, 또 다음 목표를 찾아다녔다. 게으른 나를 다스리기 위한 나름의 조치였다고는 하지만 마음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뭔가를 긴 호흡으로 꾸준히 하는 법을 잘 모른다. 늘 가시적인 성과에 목말랐고, 스스로 다그쳤으며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빨리 태세를 전환했다. 그런 환경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었다.
결국,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그렇다. 지금 내 상태는 뭔가 에너지를 소진한 번아웃에 가깝다. 무기력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기분이 끝도 없이 가라앉는다. 또 우울증에 빠질까 봐 지나치게 경계했다. 차라리 다행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슬럼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잠깐 멈추고 나를 돌아볼 수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쓴다. 전처럼 쓰지는 못해도 일기든 뭐든 쓴다. 한 문장이라도 쓰고, 조금 느리고 더디게 가도 꾸준히만 하자고 자신을 다독인다.
매일 노트북 바탕화면에 깔린 캘린더에 하루 작업량을 기록한다. 캘린더에는 매일 쓰기, 운동하기가 반복적으로 적혀있다. 오늘치를 다 했으면 취소 선을 그어 표시한다. 총 몇 시간을 했는지 기록도 한다. 며칠 전에는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썼다. 그 시간은 나에게 몰입한 시간이니까 상관없이 쓴다.
이렇게 하니까 무슨 운동선수도 아니고 지나치게 기록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해도 구체적인 결과가 없고, 제대로 하고 있는지 자기 의심이 들 때 지난 기록을 본다.
‘아! 그래도 뭔가를 하고 있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건 아니구나!’를 느낄 때 적지 않게 자기 위안이 된다. 굳이 타이머를 켜고 시간 기록을 하는 건 집중력을 높이고, 딴짓을 방지하는 용도일 뿐 지난 기록을 보고 분석하거나 평가하지는 않는다.
해야 할 일이 체크되지 않거나 시간 기록이 낮은 날이 있으면 이날 나의 컨디션이 저조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 기록이 반복되면 일정을 조절하고, 좀 더 나를 돌보는 시간을 가진다. 할 일 때문에 후순위로 미뤄두었던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몰아 보고, 공부와 상관없는 가벼운 책을 읽는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생활을 한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 자유를 주고 나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원래의 루틴으로 돌아오고 싶어 진다. 예전에는 한없이 늘어질까 봐 걱정했는데 그 정도로 게을러 빠지지 않은 자신을 보고 내심 안도한다.
슬럼프는 주기적으로 온다. 지금 이 시기를 넘기고 나면 또 한 번의 성장을 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버텨본다. 성장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를 좀 더 믿게 된다.
슬럼프가 끝나길 기다리는 동안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고 배를 채웠다.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어서 여름 내내 해 먹고 남은 국수장국에 냉장고 채소를 털어 온메밀 국수를 해 먹었다. 발가락부터 따뜻한 온기가 차오른다.
좋다. 다시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계속 쓸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