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고사양 컴퓨터를 쓸 일이 있어서 집 근처 피씨방에 함께 갔다. 거의 십몇 년 만이다.
요즘 피씨방은 자리에 앉은 채 모니터로 음식을 주문할 수 있다길래 해 보고 싶었다. 평일 저녁인데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작업하는 동안 주문한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피씨방에서 게임을 안 하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새로운 장소에 가면 어떤 사람들이 오는지 둘러보는 게 취미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아서 쳐다봐도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특이한 게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중장년 남성들은 흡연실과 가까운 곳에 모여 있었다.
카지노 영화에서나 보던 슬롯머신 같은 화면이 보였는데 금액이 억 단위였다. 현금인지 사이버 머니인지 몰라도 부자들이었다. 차림새로 보아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 같았다. 새벽에 일어나 고된 일을 마치고 피씨방에서 도박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듯했다.
사람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사람 관찰은 좋아한다. 요즘 중장년층을 보면 남일 같지가 않다. 나이가 들수록 주변 사람의 연령대도 덩달아 높아진다. 대학원에도 중장년층이 많아서 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겉모습만 보고 어땠는지 판단할 수 없지만, 가까이서 대화를 나눈 사람이나 멀리서 본 사람이나 어째 하나같이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이 없다.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재산, 직업 등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중년 남성들은 왜 하나같이 노는 게 뻔할까? 술 마시고 노래방에 가거나 도박을 하거나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골프를 치고 술을 마신다. 그나마 인문학 공동체나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들은 공부를 하러 온다. 물론 내가 아는 한이므로 일반화할 수 없다.
내 주변의 바운더리가 워낙 좁아서 그런가 싶어 ‘50대 여성 롤모델’로 검색을 해봤다.
원하는 결과는 없고 죄다 ‘20대로 보이는 동안 비법’, ‘50대 여성 다이어트’ 따위만 나왔다. 몸매만 잘 가꾸면 성공한 삶인가? 자기만족인데 누가 뭐랄 것도 없다. 아무리 젊어 보여도 나이 드는 걸 피할 수는 없다. 겉모습만 젊어 보인다고 내면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학원에서 만난 중년들은 나름 큰 결심을 하고 공부를 하러 왔을 텐데 공부하는 태도나 언행을 보고 별로 배울 게 없었다. 대학원에 왔으면 나이를 떠나 학생이라는 자각을 해야 하는데 여전히 자신이 살아왔던 생활방식 안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은 다른 학과 전공을 한 과목 듣는 중인데 거기에도 중년 여성들이 많다. 수업 마치는 시간이 직장인 퇴근 시간과 겹쳐서 바쁘게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나와 동선이 겹치는 분이 있었다. 수업 시간에 안면을 튼 적이 없어서 잠자코 있었는데 먼저 말을 걸길래 할 수 없이 가는 길까지 대화를 했다. 그분은 이렇게 서둘러 가는 이유가 집에 가서 살림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서 저녁밥을 해야 하니까요. 선생님도 마찬가지 아니에요?
아... 오늘 같이 수업 듣는 날은 간편하게 먹어요.
나도 그렇긴 한데 그래도 기본적으로 할 건 해야지.
그놈의 밥이 뭐라고 하루쯤 대충 시켜 먹든가 사 먹든가 하면 안 되나. 요즘 세상에 집에서 꼭 밥을 해야 하냔 말이다. 부모를 떠나 독립이든 결혼이든 해 보니 제일 번거로운 게 끼니 챙기기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수업 듣느라 지친 상태인데 집에 가서 쉬지도 못하고 남편 밥이나 해야 하다니 대답이 참 극사실주의였다. 어린아이가 있을 나이도 아닌 분이 놀러 간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게 그렇게 눈치 볼 일인가. 그 사람의 생활방식을 뭐라 할 자격은 없지만,
나까지 자신과 같은 처지로 매도하는 듯해 “아뇨! 저는 남편이 알아서 해요”라든가 “이런 날은 시켜 먹든가 하면 되죠” 따위의 말대꾸를 하려다가 괜히 말만 길어질까 봐 말았다.
대학원에서 만난 중년들은 자녀가 군대 간 얘기, 자식 결혼 시킨 얘기, 자기 자식 자랑뿐이다. 나는 거기에 해당하는 게 하나도 없다.
나만 이런가 싶어서 친하게 지내는 동생에게 주변에 롤모델로 삼을 만한 50대가 있냐고 물어봤다. 직장에서 50대 여성은 당연히(!) 없고, 남성은 임원급인데 일개 직원인 자기와 상관이 없는 부류라고 했다.
워낙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내가 질문하기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40대가 넘은 여성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참 서글프다. 우리나라 중년의 삶이 참, 그렇다.
나이는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드는 거라서 전혀 개의치 않았던 30대를 지나 40대가 되니 하루하루가 소중하다. 40대가 되어서 서글픈 게 아니다.
이제는 정말 내 나이에, 내 삶에 책임질 때가 되었구나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