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비우울 사이
2년 전 브런치 작가로 승인받으려고 제출한 연재 계획의 주요 키워드는 ‘이혼’과 ‘정신분석’이었다.
“이혼 경험을 정신분석 전공 지식과 접목해서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겠다”라는 다소 거창한 포부에 부풀어 있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던 이혼을 공개적으로 쓰자 예상보다 높은 호응에 한껏 취해있었다.
마치 그간의 고생을 위로받는 느낌이랄까. 가족에게도 받지 못한 위안을 불특정 다수의 독자에게 받아서 새로웠다. 처음의 망설임과 달리 한번 공개하기 시작하자 나에게 일어난 이벤트를 쓸만한 콘텐츠로 활용하느라 바빴다.
그렇다.
알고 보니 나도 관종이었다.
다음 포털 메인으로 여러 차례 노출되면서 조회 수가 소위 떡상했다. 듣도 보도 못한 관심과 호응에 ‘이혼하길 잘했어’라며 헛소리를 하기까지 했으니 오죽하랴. 그러나 워낙 남한테 엄격하고 자신한테는 더 엄격한 스타일이라 얼마 안 가 정신을 차린다. 차라리 정신 못 차리고 계속 썼으면 뭐가 돼도 됐을 텐데….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리게 된 계기는 그해 연말에 브런치에서 가장 많이 쓴 주제를 기준으로 ‘OO 전문 작가’라는 이모티콘 배지를 부여하면서다. 나에게 ‘이혼 전문 작가’라고 떡하니 찍혀 있는 게 아닌가! (지금은 이 배지가 사라지고 ‘ㅇㅇ분야 전문 크리에이터’로 바뀌었다.)
이. 혼. 전문 작가라니.
내가 이혼 관련 글을 좀 써서 초기 구독자를 불러모았지만, 결단코! 그렇게 규정되고 싶지 않았다. 영광스러운 배지가 아니라 사회에서 ‘이혼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처럼 주홍글씨 같았다.
정작 쓰고 싶은 글은 그게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관심을 두니까 어디까지 써야 할지도 모르겠고, 지금은 내 곁에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부류의 글을 계속 쓰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동반자에게 비밀로 하지 못하고 처음에 관심 받는 게 신기해서 입방정을 떨었던 게 죄다.
더는 글쓰기가 망설여졌다.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고,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난감했다. 솔직함과 정제됨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우울증이 몰려왔다.
이혼 전후부터 우울증을 겪었고, 생각보다 이른 시일 내에 치유하고 우울증 약을 끊은 상태였다.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가끔 훅 밀려오는 우울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또다시 심해지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나를 잃지 않기 위해 글을 써보았지만, 예전처럼 쓸 수가 없었다.
겁이 났다.
이대로 많은 사람이 봐서 현실에서 누가 알아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부터 ‘동치미’에나 나올 법한 얘기로 관심받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작가 지망생이면서 자존심만 프로 작가 못지않았기에 혼자 심각했다.
결국, 꾸준히 쓰지 못하고 브런치를 접었다. 그동안 올렸던 글도 모두 비공개 처리했다. 다시 쓰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학위 논문 작업을 핑계로 이쪽은 쳐다도 안 봤다. 브런치를 보면 또 우울해질 것 같았다. 내가 이혼 전문 작가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이 관련 주제의 글이 많아졌고, 인기 순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지각색의 이혼 스토리를 보며 이혼이 아무리 흔한 일이라고 해도 막상 말할 곳은 별로 없는지를 느꼈다.
나름의 아픔을 각자의 방식으로 이겨내는구나 싶었지만 이제 와서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이미 늦었다.
관심받을 수 있는 주제를 쓰지 않아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글을 계속 썼더라면 지금 얼마나 성장했을지 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글을 공개하면 독자들의 반응이 궁금하지만 조회 수나 구독자 수에 연연해서 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고 싶다). 지금의 구독자도 처음에 이혼 얘기로 소위 떡상 했을 때 구독한 분들이 대부분이라 현재 내 글을 보러 오는 분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너무 행복하거나 너무 우울해도 글을 쓰기가 어렵다. 우울한 날에는 ‘이딴 걸 써서 뭐해’ 따위의 부정적인 생각만 올라왔다. 글 속에 있는 나의 어둠을 보여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솔직하지 못하게 글을 쓰면 자꾸만 자기 검열에 걸리고, 멈칫거리고, 읽는 사람도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껄끄러웠다.
초보 브런치 작가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뒤 글 공백기였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뭔가 계획을 세우고, 하루하루 열심히 읽고 쓰고, 공부하지만 갑자기 꼼짝할 수 없이 정지한 기분이 들었다. 딴에는 미친 듯이 막 발을 저었는데 막상 둘러보면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고 있다. 바보가 된 기분이다.
이런 나를 보면 얼마나 우스울까. 세상이 나를 조롱하고 있지 않을까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뭐를 위해서 앞으로 달리고 있었나.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제대로 하는 걸까. 또 의심병이 도져서 무탈한 일상에 제동이 걸렸다. 한번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가슴에 구멍이 난다. 까만 점 같은 얼룩이 묻었는데 점점 커지는 기분도 든다.
그렇다.
오늘은 우울한 날이다.
막막한 우울함에 눈물이 났다. 괜히 서럽다. 내 감정을 돌보게 되면서 부쩍 눈물이 늘었다.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았나. 눈물을 흘린다는 건 나약하다는 증거라 여겼다. 남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아! 내가 잘 견디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나는 좀 힘들었구나.
내 마음을 잘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터지고 나서야 알았다. 좀 지쳤다. 직장인도 아니면서 지쳤다는 말을 쓰기가 염치없게 느껴졌다. 직장인도 아니고, 엄마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려동물도 키우지 않는 내가 지쳤다니. 그런 말을 쓰면 안 될 것 같았다. 자격이 없는 것 같아서.
이런 날은 한바탕 울거나 한껏 우울의 늪에 빠져있어도 괜찮다. 영원한 것은 없다. 곧 괜찮아질 거라는 걸 안다. 시간이 걸려도 억지로 괜찮은 척하면 안 된다.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글쓰기는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라고 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그도 유명해지기 전까지 수많은 거절 편지를 받고 생계가 어려웠지만 놀랍게도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종이에 옮겨 놓은 낱말은 단 한 개도 없다”라고 한다. 글을 쓴 진짜 이유는 “자신이 원해서”이다.
글쓰기의 순수한 쾌감이 스티븐 킹을 오늘의 자리에 있게 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저 좋아서 뭔가를 한 일이 있을까.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그 행위 자체에 몰입해서 즐거웠던 적이 언제였던가.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아무 생각 없는 것만 못하다.
보통은 기분이 괜찮은 날에만 글을 썼다. 오늘은 덜 괜찮아도 썼다.
‘그것’은 쓰기 싫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글쓰기 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