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동생과 함께 살 때의 일이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세면대에서 이를 닦고 동생은 샤워부스 안에서 샤워를 하며 이를 닦았다. 그래서 욕실에는 늘 치약이 두 개였는데, 나는 동생이 쓰는 치약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슬쩍 새 것으로 바꿔두곤 했다. 치약이 아직 남아 있지만, 그걸 짜서 쓰는 데에 조금 시간이 들겠다 싶으면 세면대 쪽에 두고 내가 마저 썼던 거다. 이건 사실 엄마도, 동생도 잘 모르는 이야기다. 누가 들으면 웃을 수도 있겠다. 서른도 넘은 동생을 굳이 그렇게까지 챙겨야 하느냐고.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냥, 그 당시에 새벽같이 집을 나서고, 하루가 멀다 하고 회식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동생이 안쓰러웠던 것 같다. 밤늦게까지 작업하다가 현관문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리면 굳이 방문을 나서서 얼굴을 내밀었다. 지친 동생 얼굴을 보면서, 수고했다고, 잘 들어왔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네가 겪은 하루를 나는 전부 알 수 없지만, 힘든 것은 안다고, 너를 조금은 더 알고 싶다고.
누구나 한 사람 몫의 삶을 산다. 살면서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삶뿐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그 사람의 고통을, 외로움을, 전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사람의 외로움을 헤아리고, 되도록 메워주고 싶다. 나는 그러니까, 동생의 외로움을 조금은 더 함께 짊어지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늦게까지 작업하느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른 아침에, 간밤의 회식에 지친 동생이 샤워를 하다가 치약이 떨어지는 장면을 상상했던 것 같다. 샤워를 하다 말고 나와서 수납장에서 치약을 찾는 것, 찾아지지 않아서 짜증이 난다거나, 몇 분 차이로 출근이 늦을까봐 초조해지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동생의 삶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급한 아침은 나도 조금은 아니까, 게다가 나는 어차피 조급하게 이를 닦을 일은 잘 없으니까, 그가 1분이라도 평안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치약을 바꿔 주었던 것 같다.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그의 아침에서 1분만큼의 평화를 지켜주고 싶었던 거다.
아마도 전형적인 관계의 틀에 얽매였다면, 삼십몇 살이나 먹은 동생의 치약을 굳이 바꿔주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삶을 상상하고 약간의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에, 나이나 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형적인 관계에 매여 행동하거나 요구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빈 곳을 메워주는 것, 그러니까 관계의 개별성을 제대로 이룰 때, 우리는 서로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게 아닐까.
엄마는 더 이상 나를 아침 일찍 깨우거나 밥때를 재촉하지 않는다. 그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있을 테고, 타인의 대다수가 사는 '정상궤도'의 삶을 부모가 요구하는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테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딸의 삶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기 마음이 쪼그라들어도 겉으론 재촉하지 않고 바라보는 거다. 제 알아서 원하는 때에 꽃피도록.
사실 우리는 모두 이상하게 산다. 각자의 욕망과 목표, 그것을 위한 개개인의 삶의 질서와 사소한 규칙들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저 이의 사소한 질서를 이해하는 것. 일반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주는 대신, 더 작고 초라하더라도, 조금 이상하더라도 그가 원하는 삶에 적합한 것을 주는 것, 이상한 그의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거다. 이 척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만큼은 그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특별하게 빛나도록 만들어주는 방법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알랭 드 보통의 문장처럼,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도 넓어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넓게 멀리까지, 오랫동안, 자기 색으로 선명하게 존재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조금 이상한 방식으로 사랑해도 그러려니 해주길, 내 작은 마음을 보태서 당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한 뼘 더 넓히려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