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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미영 sopia Apr 11. 2023

책 리뷰 -  { 그런 하느님은 원래 없다}

가톨릭 출판사 2023년 3월 / 지은이 한광석 / 255pag

부조리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에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


성지 후원을 계기로 한광석 신부님께서 보내주신 책이다. 저자는 1998년 사제품을 받은 후 서강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현재 대전 가톨릭대학교에서 생명과 성 윤리와 신학 주제로 신학생들과 함께 하고 있다. 이 책은 무신론과 물질문명과 과학의 시대에 어떻게 하느님을 믿을 지에 대한 사목적 고민이 담겼다. 신앙을 잃은 조카와 대화를 나누듯 삼촌의 마음으로 용기를 내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무신론과 과학, 악의 문제를 고민하며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래서 전문적인 신학 서적이라기보다 인문학적 접근임을 밝혀 둔다. 주제와 내용은 신앙과 신학의 깊이를 다루고 있다. 책은 6장으로 1장, 과연 하느님이 계실까? 2장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악이 있을까? 3장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실까? 4장 돈이 최고인 시대에 하느님의 자리는? 5장 가톨릭은 성性에 너무 보수적이지 않나? 6장, 인공 지능 시대에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로 구성되었다.


저자는 하느님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들, 현존을 충만히 누린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하다고 한다. 부재 경험은 무신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다른 방식이라고 한다.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무신론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신은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신은 절대적인 존재로 시공을 초월하고 인식 능력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한정된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고, 말이나 글로도 다 표현할 수 없다. 이렇듯 우리가 절대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앎이나 체험은 불안전하다. 절대자를 '이렇다 저렇다'라고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의 표현, 생각, 견해, 이론, 교리 등은 모두 절대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한 시기에 생각을 절대화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절대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잘못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절대자 하느님과 함께하는 체험을 통해 삶을 완성시키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고통은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하느님의 부재를 드러내는 장소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우리 모두의 희망을 드러 내신다. 예수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하느님의 침묵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는 세상 구원에 자신을 비우는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약속이다.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함께, 고통 안에서, 고통을 통해 하느님을 고백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악과 고통은 해결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악과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 존캅이나 그리핀과 같은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존재라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신이 도덕군자로서의 엄한 심판자이기만 하다면, 신이 세상의 고통과 비극에 무감각한 절대자라면, 신이 인간을 인형처럼 조종하고 자유를 박탈하는 통제자라면, 신이 부조리한 현실을 옹호하고 묵인하는 존재라면, 신이 여성을 비하하는 남성성을 가졌다면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부분이 책의 제목과 관련 핵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연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알고 싶어 하는 열망과,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떤 의문이 공존한다. 먼저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면 잠시 생각해 볼 것을 권한다. 이는 '사업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혹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나?'라는 질문과 비슷하다. 사업이 성공하거나 행복이 커지는 방법을 찾는 질문은 결과에 중점을 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과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 곧 '내기도를 들어주실 하느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다른 위격의 활동에도 참여하는 '하나의 친교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기도는 하느님과 신앙인이 맺는 인격적 관계이며, 세심하게 그분의 현존과 활동을 인지하고 순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응답받지 않는 기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올바른 기도에는 적절하게 응답하신다.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특히 한국인은 식당에서나 걸을 때도 그리고 인터넷 속도까지 빨리빨리 문화에 젖어 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삶의 본질적 의미와 가치를 기억해야 한다. 현대의 자본주의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모습은 소비 풍조이다. 이제는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며 유행이나 만족감에 주문하고, 쉽게 버리는 소비문화가 자리 잡았다. 저자는 이런 소비 풍조가 자칫 하느님의 관계까지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시대를 반영하는 것 중에 봉사활동은 유행처럼 바뀌기도 한다. 봉사를 행사치레로 시간만 때우거나 경력을 쌓기에 이용하는 경우도 있음을 지적했다. 본당의 여러 신심단체나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도 업적 위주로 끝나기도 한다. 학생들마저도 봉사시간을 경력 쌓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용하다는 것에 마음이 빼앗기고 일회용 해답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것은 기다림과 인내라는 덕이 없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최선을 다하며 주님께 기도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어 본다.

    


돈이 최고인 시대에 하느님의 자리는?


1139년에 열린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빌려준 돈에 이자를 물리기는 것을 수치스러운 행위로 비판했다. 1179년에 열린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고리대금업자를 공식으로 교회에서 파문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식의 장례나 매장까지 금지하였고, 그들이 내는 현금과 현물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311년에 열린 비엔나 공의회는 고리대금을 허락하거나 보호한 사람까지 파문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대부업에 종사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 153page


고리대금업 조치는 반유다주의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 대신에 기생 민족으로 설움을 받던 유다인이 대부업을 도맡아 하게 되면서 멸시를 더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지소유도 못하고 상공업에도 종사하지 못했던 유다인들은 혐오의 대상인 고리대금업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교의 첫 천년 동안 으뜸은 교만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그 자리를 탐욕의 직업인 고리대금업이 차지하였다. 돈을 불리는 것은 거룩한 그리스도교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버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상업에 종사하는 계급의 영향이 커지면서 돈벌이를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의 시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결정적인 프로테스탄티즘의 등장이었는데 루터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다. 봉건제의 쇠퇴, 도시의 발달, 상인과 수공업자의 자유로운 거래 등으로 돈이 필수 수단으로 되면서 고리대금업을 금지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칼뱅은 고리대금업은 이웃에게 피해를 줄 때만 죄가 되며, 양심에 맡겨야 할 문제라고 하였다. 돈은 교환의 수단일 뿐이고, 돈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갔다. 칼뱅의 견해는 신교 국가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전파되었고 신대륙 개척자들에게도 뿌리를 내리게 된다. 미국의 청교도는 노동이 하느님의 소명이고, 부가 은총의 표징이라는 논리를 잘 받아들였다. 18세기의 영국의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이론을 주장했으며 시장의 기능을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19세기 독일의 베버는 자유시장 경제와 물질 만능 사회로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제공했다.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는 청부론이 미국의 주류 그리스도교의 모습이 되었다. 재물은 하느님 선물이고 절제 속에 감사히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면 되는 것이다.


AI 시대에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AI 알파고와 이세돌 바 9단의 대국에서 인간의 패배로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저자는 다가올 인공 지능 시대에 절박한 마음으로 신앙이란 무슨 의미일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가톨릭 교회는 성경을 근거로 과학적 지식에 대해 상당히 열린 자세를 보인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학문의 정당한 자율성을 충분히 깨닫지 못하고... 논쟁과 갈등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신앙과 과학을 서로 배치되는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던 정신자체를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과학의 문제에 충분히 사려 깊게 대응하지 못했음을 성찰하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과학 기술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볼 줄 안다. 과학 기술의 발달 자체보다 누가, 어떻게 그 기술을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뛰어난 기능을 가진 기술이 아니라 그것을 조절하는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이라는 총 5가지의 감각이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 같지만, 작은 생명체인 바이러스는 현미경을 통하지 않고는 볼 수 없다. 그리고 원자, 원자핵, 양성자, 중성자, 전자, 쿼크 등도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광활한 우주라는 거시 세계는 신비로 가득 차 있다. 2009년 유럽 우주국이 위성에 프랭크 망원경을 탑재해 비밀을 밝혀 주었다. 우주를 구성하는 것 중 눈에 보이는 것은 겨우 5%라고 한다. 인간의 눈은 일정한 범위만을 볼 수 있을 뿐, 너무 작거나 크면 볼 수 없다. 또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미각 5가지의 맛으로 규정하지만 훨씬 많은 맛들이 존재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을 실제로 본 적이 없으며, 또한 제대로 본 사람이 없다. 그분은 숨어 계시며 숨어 계셔야만 하는 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그분의 거룩함을 감당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안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결정적인 모습으로 명백하게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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