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소라 Aug 20. 2021

『파친코』가 『파친코』인 이유

이민진의『파친코』를 읽고

    『파친코』는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베스트셀러인 동시에 미국인 독자들이 극찬한 책이다. 그러나 나는 이 소설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의 정서가 한국적인 정서와 거리가 있는 데다가 가끔 눈에 띄는 번역상의 오류가 있었고, 번역자가 써넣었음 직한 유창한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작가의 화법과 어울리지 않았던 점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이 이야기가 애플TV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우리의 국민배우인 윤여정과 이민호가 나온다고 하여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었다. 결론은 이 소설이 미국 문학이라는 것이었다. 등장인물이 모두 조선인이기 때문에 이 소설을 한국문학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이민진 작가는 한국인의 유전자를 이어받았지만 미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사람이다. 그녀가 아무리 한국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고 한국이민자들에 대해 연민을 갖고 있다 해도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미국인의 관점에서 쓰였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영어로 사고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미국적일 수밖에 없다. 이는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디킨스와 톨스토이의 글에 비교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파친코』가 한국문학이든 미국 문학이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재미있으면 된 것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한국인에게 미국인의 정서를 심어놓은 이 이야기에서 재미를 느끼기가 어려웠다. 내가 미국인이고 이 이야기를 외국인의 이야기로 읽었다면 좀 더 쉽게 재미를 느꼈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나의 커다란 착각을 인정하고 이 소설을 미국인이 재일 한국인의 역사를 들여다보고 쓴 이야기로 받아들인 후에야 독서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파친코를 미국문학으로 받아들인 후에야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선자의 운명을 바꿔놓은 고한수는 재일 한국인의 빅브라더였다. 일본 야쿠자 수장을 장인으로 둔 그는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런 고한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엄청난 행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건만 선자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도덕적 삶을, 고통스러울 수 있는 삶을 선택한다. 교육받지 못한 십 대 소녀가 그렇게 단호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에 대해 작가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고 있지만 아무래도 작가가 생각하는 한국 여인의 이상적 이미지를 선자에게 투사한 것 같다.    

  聖者 같은 백이삭이 선자의 명예를 지켜주었지만, 평생 계속되는 고난을 막아주지는 못했다. 백이삭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에 반해 도덕적으로는 악인이라 할 수 있는 고한수가 평생 그림자처럼 선자와 그녀 자손들의 뒤를 봐주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인터넷에서 파친코의 역사를 검색해본 후 나는 선자의 후손들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 것은 역사적 필연임을 알게 되었다. 해방 후 재일 한국인들은 국적 차별로 인해 공공기관이나 민간기업에 취업할 수 없었다. 생계유지가 어려운 한인들이 파친코 기기 제조의 하청업과 경품 교환 관련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파친코를 운영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점포 경영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 모자수는 다른 사람이 운영하던 파친코 장에서 직원으로 일하며 신임을 얻은 후에 자신만의 파친코 장을 열게 된다. 모자수가 파친코 장을 하나하나 늘려가면서 부를 축적하는 이야기는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친부의 존재를 알게 된 노아가 학문의 꿈을 포기하고 선택한 곳도 파친코 장이었고, 미국에서 선진 교육을 받은 솔로몬이 결국 돌아오는 곳도 파친코 장이었다.  

    길고 불편한 독서와 정보 검색 과정을 거친 후 나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파친코』인지 이해되었다. 파친코 사업은 선자의 가족을 먹여 살렸고 이들이 일본 땅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해주었다. 일본인이 천시하여 멀리하던 이 사업을 선자의 가족들은 마다하지 않았다. 양진의 하숙업, 선자의 노점상 일과 식당 노동, 모자수의 아내 유미의 재봉 일은 모두 재일 한국인이 종사했던 노동의 종류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파친코 사업은 재일 한국인에게 허락된 사업 중에서 가장 이익이 많고 한국인 공동체를 통해 노하우를 전수하기에 좋은 사업이었기에 자연스레 파친코 사업에 뛰어든 한인들이 많아졌을 것이다. 결국 한국인이 파친코를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만족했고 그만큼 열심히 일했다. 이는 마치 선자가 미혼모가 되기로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태어난 자신의 아들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던 모습과도 겹쳐진다.

    그러므로 재일 한국인이 파친코 산업으로 부를 이룬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그들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또 선자가 야쿠자와 혼전 관계로 백노아를 임신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손가락질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게 태어난 노아 자신은 그 사실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수치를 느꼈지만 적어도 독자인 우리는 선자를 이해할 수 있다. 열여섯 선자의 사랑은 진실한 것이었으니까.


    작가가 책의 제목을 『파친코』로 정한 의도가 그것이었을까? 우리가 시대와 사회를 선택하여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고 그 때문에 박수받아야 한다는.           


매거진의 이전글 장수가 선물이 되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