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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ul 05. 2024

나는 버리기엔 아까운 사람인가?

2010년 1월 31일부터 2월 4일까지 일기

1월 31일 일요일

간밤엔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 그저께 아침에 묽은 변을 본 후 아직 변을 못 보고 있다.

옆 침대의 예진이는 부산에서 온 19세의 림프종 환자다. 작년 7월 치료를 시작했는데 강력한 항암치료를 여러 차례 받은 끝에 완전 탈모되었다. 아이는 자주 구토를 한다. 토하고 나서도 식욕이 있는지 자기 엄마에게 부탁하여 칼국수도 사다 먹고 밥도 먹고 하는 걸 보니 다행이다 싶다.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56세인 예진 어머니는 굳세고 씩씩한 사람이다. 내 딸들이 내 대신 병에 걸렸다면 나는 저 어머니처럼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오랜 간병 생활에서 오는 노련함이 느껴진다. 슬픔과 피곤함도 없을 리 없지만 그것은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다.

예진이의 공간은 집처럼 아늑하게 꾸며져 있다. 나도 일주일은 여기서 지낼 것이니 이곳을 집처럼 여기며 지내야겠다.        

(일주일 후 퇴원하면서 예진이와 헤어졌다. 아이는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다가 급속히 악화되어서 하늘나라로 갔다. 나는 3월부터 항암주사를 맞기 위해 다시 병원을 들락거렸는데 병원에서 우연히 그 어머니와 마주쳤고 그때 예진이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어제 남편이 막내를 데리고 와서 병실에서 놀다 갔다. 오랜만에, 게다가 환자복 입은 엄마를 보는 막내의 눈에는 두려움이 살짝 깃들어있었지만 이내 아이다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더 있다 가라고 넌지시 떠보았으나 유치원에 가야하기 때문에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걸 보니 분리불안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내일이라는 날은 나의 시간이 아닌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나 요즘처럼 하루 앞을 예측하지 못하고 살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일 일을 계획할 수 없게 된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든다. 올해 설에 내가 어디에 있을지, 어디에 있는 것이 좋을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부터 강의와 상담, 연구를 위해 시간을 쪼개 썼어야 했으므로 생활이 점점 규칙적으로 되어가면서 하루, 일주일, 한 달 앞을 내다보고 통제하려 애쓰며 살아왔다. 이런 몸쓸 병에 걸리고 보니 내 성격에는 그런 생활이 맞지 않았던 거란 생각이 든다.

  

대전에서 남편 친구 네 명과 그 부인들이 찾아왔다. E 부인도 함께 왔는데 작년 여름 우리가 친구들을 공주 펜션에 초대했을 때 특히 그녀가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무 유능하다보니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 쉴 수가 없었나 봐요”라고 했다. 그녀가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얼마 전 그녀가 딸의 일로 내게 상담을 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해준 조언이 도움이 되어 아이와 부모 관계가 개선되고 아이도 학교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기쁜 소식을 들으니 내가 지금까지의 삶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아 감사했다.      

지금까지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해준 지인들

2월 1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현저히 나빠진 것이 느껴진다. 허리가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다. 입원할 때 찍은 엑스레이 영상과 비교하기 위해 전신 엑스레이를 다시 찍었다.

오늘부터 다시 덱사메타손 투여를 시작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알약을 먹는 대신 주사를 맞는다고 한다. 주사약이 들어가자마자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묘하다. 열도 좀 오르는 것 같다.

  

저녁에 이종사촌언니인 O가 와서 밤새 병상을 지켜주었다. 언니는 외가의 친척들 소식을 전해주었고, 내가 치료받는 동안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었다. 이종사촌들과 이모들은 우리와 신앙이 달라서 나는 그들을 심적으로 별로 의지하지 않았었다. 내가 그들을 도울지언정 그들이 나를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그들이 늘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보다 더 내 생각을 많이 해주는 외가의 친척들

2월 2일 화요일    

어제부터 시작한 덱사메타손 주사를 두 번째 맞으니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따끔거리는 현상이 줄어들었다. 네 번째 부터는 혈관이 확장되는지 손이 따끔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아침에 뼈 스캔하느라 방사성 동위원소를 주사했는데 그것 때문인지 어지럼증이 좀 있다.  

P 선생과 통화했다. W 선생과 Y 집사가 격려 문자를 보내주었다. J 권사님과 통화했는데 기도 중에 평안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아까워서 나를 데려가지는 못하실 거라고도 하셨다.    

하지만 그 말은 설득력이 없다. 하나님은 아까운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데려가셨는가 말이다. 내가 주기철 목사나 김구 선생,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보다 더 아까운 사람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내가 이 병으로 수년 내에 죽게 되면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가족들은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천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순하고 조용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교회에서는 ’믿음 좋은‘ 사람으로 불리웠다. 아이들은 ’한없이 대화하고 싶은‘ 엄마, ’재미있는‘ 엄마라고 부른다. 친구들도 나를 좋아한다. 학생들은 나를 존경한다. 

그들의 평가가 실제의 나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지 몰라도 나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내가 주와 함께 있기를 바라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기 때문에” 삶을 계속해야 한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   

   

고등학생일 때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시험문제를 열심히 풀다가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하는 생각이 몰려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생각을 그치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내 핏속을 흐르는 허무주의 때문에 나는 대체로 소극적인 삶을 살았다. 내가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뒤늦은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결혼을 하고 보니 나는 내 인생의 주연이 아니었다. 내게 아내와 엄마라는 역할 말고 다른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희미해진 존재감을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음대에 편입했다. 공부는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세상 앞에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삶의 의욕을 느낀 것은,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은 결핍과 제약을 경험하고 난 후부터였다.     


2월 4일 목요일

최근 (아프기 직전) 독서 모임에서 고통을 주제로 한 책들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가야할 길』, 『끝나지 않은 여행』, 『고통의 영성』, 『고통보다 깊은』 같은. 이 책들을 읽으며 주로 마음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었다. 이 책들은 마음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임을 역설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보다 원초적인 ‘몸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고열과 복통으로 이틀을 시달리고 나니 통증 없는 몸이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지 알 것 같다. 육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한다.

통증 없는 몸은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가!

여동생이 갖다 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읽으니 몸의 고통이든 마음의 고통이든 그것을 피하는 것이 나의 목표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모든 고통은 언젠가는 끝난다. 그래, 언젠가는 끝날 이 고통을 주님께 맡기자. 다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를 빨리 데려가 달라는 기도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몸으로 사는 것이 가족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란다.

Y 사모님이 내일 H 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으신다고 한다. 사모님이 잘 이겨내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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