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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ul 05. 2024

오늘만 사는 삶

    내일이라는 날은 나의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다발성골수종을 진단받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임을 깨달았다. 

     2009년은 박사학위를 받은 지 3년 차에 접어든 해였다. 둔산 집에서 궁동으로 강의하러 가는 아침이면 초록의 향연이 펼쳐졌다. 내 인생에 이런 풍경이 허락되었다는 사실에 전율하면서 아침마다 학교로 출근했다. 막내가 5살이었다.

    학위 논문 쓰느라 엄마가 학교에 처박혀 있는 동안 아이는 육아도우미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내 나이 마흔여섯에 낳은 늦둥이 딸이었다. 비눗방울처럼 부풀었다 터지는 웃음을 웃는 아이를 두고 집을 나서려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목표는 나를 재촉했다. 학위를 받은 다음에 나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나는 기어이 목표를 이루고 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지만 죽을 것 같은 피로감 끝에 극심한 갈비뼈와 허리 통증이 찾아왔고, 헛된 치료와 끝없는 검사 후에 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진단 받은 지 열흘도 안 되어 영락없는 환자 꼴이 되어 입원실에 누워있던 나는 그 상황이 실감나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하루, 일주일, 한 달을 계획하고 통제하려 애쓰며 살았던 그동안의 생활이 내게는 맞지 않았던 거라고 생각하니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이제는 내일 일을 예측할 수도 없고, 따라서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한없이 편안하게 했다.      



일기 발췌_1월 31일 일요일

    간밤엔 모처럼 깊은 잠을 잤다. 그저께 아침에 묽은 변을 본 후 아직 변을 못 보고 있다.

    옆 침대의 예진이는 부산에서 온 19세의 림프종 환자다. 작년 7월 치료를 시작했는데 강력한 항암치료를 여러 차례 받은 끝에 완전 탈모되었다고 한다. 아이는 자주 구토를 한다. 토하고 나서도 식욕이 있는지 자기 엄마를 시켜 칼국수도 사다 먹고 밥도 먹고 하는 걸 보니 다행이다 싶다.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다.
    56세인 예진 어머니는 굳세고 씩씩한 사람이다. 내 딸들이 내 대신 병에 걸렸다면 나는 저 어머니처럼 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는 오랜 간병 생활에서 오는 노련함이 느껴진다. 슬픔과 피곤함도 없을 리 없지만 그것은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일주일 후 퇴원하면서 예진이와 헤어졌다. 아이는 퇴원과 입원을 반복하다가 급속히 악화되어서 하늘나라로 갔다.)

    어제 남편이 막내를 데리고 와서 병실에서 놀다 갔다. 오랜만에, 게다가 환자복 입은 엄마를 보는 막내의 눈에는 두려움이 살짝 깃들어있었지만 이내 아이다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서울에 더 있다 가라고 넌지시 떠보았으나 유치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집에 갈 거라고 말하는 걸 보니 분리불안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다.         
    대전에서 남편 친구 네 명과 그 부인들이 찾아왔다. 영인이 엄마도 함께 왔는데 작년 여름 우리가 친구들을 공주 펜션에 초대했을 때 특히 그녀가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무 유능하다 보니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 쉴 수가 없었나 봐요”라고 했다. 그녀가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알기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의 삶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해준 지인들
일기 발췌_2010년 2월 1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현저히 나빠진 것이 느껴진다. 허리가 아파서 걷기가 힘들었다. 입원할 때 찍은 엑스레이 영상과 비교하기 위해 전신 엑스레이를 다시 찍었다.
     오늘부터 다시 덱사메타손 투여를 시작했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알약을 먹는 대신 주사를 맞는다고 한다. 주사약이 들어가자마자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묘하다. 열도 좀 오르는 것 같다.
    저녁에 이종사촌인 옥선 언니가 와서 밤새 병상을 지켜주었다. 언니는 외가의 친척들 소식을 전해주었고, 내가 치료받는 동안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주었다. 이종사촌들과 이모들은 우리와 종교가 달라서 나는 그들을 심적으로 별로 의지하지 않았었다. 내가 그들을 도울지언정 그들이 나를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달리 그들은 늘 나를 염려하고 있었다. 그들을 보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좁은 세계에서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나보다 더 내 생각을 많이 해주는 외가의 친척들
일기 발췌_2010년 2월 2일(화)    

    덱사메타손 주사를 두번째로 맞았을 때는 첫 번째에 비해 겨드랑이와 사타구니가 따끔거리는 현상이 줄어들었다. 아침에 뼈 스캔하느라 방사성 동위원소를 주사했는데 그것 때문인지 어지럼증이 좀 있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4일(목)

    덱사를 네 번째 주사한 때부터는 혈관이 확장되는지 손이 따끔거리고 얼굴이 붉어진다.  

    최근 (아프기 직전) 독서 모임에서 고통을 주제로 한 책들을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직도 가야 할 길』, 『끝나지 않은 여행』, 『고통의 영성』, 『고통보다 깊은』 같은. 이 책들을 읽으며 주로 마음의 고통에 대해 생각했었다. 이 책들은 마음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임을 역설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보다 원초적인 ‘몸의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고열과 복통으로 이틀을 시달리고 나니 통증 없는 몸이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지 알 것 같다. 육신의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완전히 공감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나를 반성한다.
    여동생이 갖다 준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을 읽으니 몸의 고통이든 마음의 고통이든 그것을 피하는 것이 나의 목표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나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모든 고통은 언젠가는 끝난다. 그래, 언젠가는 끝날 이 고통을 주님께 맡기자. 다만 너무 고통스러워서 나를 빨리 데려가 달라는 기도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몸으로 사는 것이 가족과 이웃에게 유익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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