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한 욕망과 다시 찾은 자유
입원실과 친정의 내 방은 금욕의 공간이었다. 대개 욕망의 추구는 병의 치료에 역행하는 법이어서 나는 몇 가지 욕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내가 가장 먼저 포기한 욕망은 성취가 주는 흥분이었다. 아프기 전에는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 피로를 무릅썼고 몸의 보내는 신호를 무시했다.
다음으로 포기한 것은 신체의 자유였다. 우리는 신체의 이동 또는 활동을 통해 사물을 나의 통제 하에 둘 수 있다. 기력이 쇠하여 다리에 힘이 없었던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신체활동은 눕기와 일어나기, 그리고 몇 발자국 걷기뿐이었다. 책 한 권 들고 걸어가기도 어려웠다. 그러므로 한 번 이동할 때 여러 가지 물건을 나를 수 있었던 과거에 비하면 몸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상실한 셈이었다.
보행의 자유를 금지당한 후 음식을 선택할 자유, 기호식품을 섭취할 자유를 반납했다. 2인실에 있을 때는 급기야 TV 채널 선택권도 박탈당했다. 허리와 팔이 아프니 앉아서 책을 읽기도 어려웠고 사고장애가 동반되니 책을 읽어도 잘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을 떠나 친정에 온 후 나는 몇 가지 자유를 다시 얻었다. 수액 줄로부터의 자유, 원치 않는 TV 소음으로부터의 자유, 음식을 선택할 자유, 클래식 음악 채널을 들을 자유까지. 병든 사람으로서 이 이상의 자유를 누리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그러한 호사를 누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의 저자들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고 라디오 방송은 세상의 모든 노래를 들려주었다. 더디게 읽고 듣다가 잠이 들어도 책과 음악이 있어서 행복했다. 그러다 세상에는 왜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노래가 존재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모든 사람이 이야기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노래를 짓는 것도 아니건만. 이 세상에 노래를 짓고 부르는 자들과 이야기들 들려주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이야기와 노래는 삶의 결정이며 삶이 응축된 물방울이다. 나는 삶을 원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읽고 노래를 들었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6일(토)
내가 무슨 훌륭한 일을 했다고 이렇게 호사를 누리는지 모르겠다. 어제까지 덱사메타손 2차 사이클을 끝내고 오늘 친정에 왔는데 치료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식욕이 당긴다. 양갱이 먹고 싶었다가 말린 과일이 생각났다가 우유 생각이 간절하다.
엄마와 아빠는 아침부터 나를 퇴원시키고 내 방을 마련해 주느라 엉덩이를 붙이지도 못하는데 나는 먹고 싶은 것이 새록새록 생각난다. 돌봐주는 이 없이 홀로 투병해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일기 발췌_2010년 2월 8일(월)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2010년은 우리에게 특별한 한 해가 되겠지요. 지금까지 25년을 함께한 우리, 앞으로의 25년도 함께 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라고.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어찌어찌 25년을 함께 했다. 그는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늘 내 곁을 지켜주었다. 지금도 꿋꿋이 서서 나와 딸들을 지켜주고 있다.
한결 같이 변함없는 그 성격이 나를 답답하게도 했고 지루하게도 했다. 좀 더 유연하지 못하고 너그럽지 못하고 자발적이지 못하여 내 마음을 갈증 나게 했다. 하지만 그는 변덕스럽고 불만투성이인 나를 참아주었다. 혼자서는 양말 한 켤레도 사지 못하는 남편. 그는 그런 의존적인 모습으로 자신이 내게 속한 사람임을 증명한다.
서대문 극동아파트 106동 503호는 엄마가 나를 두 번째로 낳아준 산실이다. 50년 전 부산 침례병원에서 엄마가 나를 낳았을 때 흘린 피와 눈물이 헛되게도, 엄마는 또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다.
엄마의 생일인 올 1월 20일 하루 전에 나는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딸이 고통받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마나 떨렸을까?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엄마의 우울한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를 살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힘을 기울여 나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나는 엄마의 자궁에서 보호받던 그 옛날과 같이 안전함을 느낀다. 50년 전 그때 엄마는 외부에서 오는 위험과 공격, 오염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자궁벽을 요새처럼 두껍게 만들었다. 자궁 속에는 내 몸이 형성되는 데 필요한 자양분이 가득했다. 지금 내가 있는 이 방도 그렇다. 위안과 따스함, 빛, 찬양, 그리고 기도가 있다.
나의 일상은 자궁 속에서 아기가 자라듯이 비밀의 시간들로 채워져 간다. 세포가 분열하고 증식하며 신체 조직이 하나씩 생겨난다. 눈, 코. 입, 손, 발이 생겨난다. 아무도 모르게 아기는 자란다.
하루가 무척 길다. 새벽에 죽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TV 방송 설교를 듣고 복음성가를 부르고 D와 통화를 했는데 오전 10시밖에 안 되었다. 지금 시간은 일터에 있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한 주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들이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9일(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저녁에 부모님과 나, 예은이가 가정예배를 드렸다. 시편 91편 말씀을 읽고 합심해서 기도하는데 몸이 뜨거워지고 땀이 났다. 내 병은 이미 다 치유받았다는 믿음이 차올랐다. 그래서 이젠 나를 위한 기도만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도 하자고 제안했더니 엄마는 아직은 다른 기도를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염치없지만 너를 위한 기도밖에 할 수가 없다고. 다른 기도를 할 힘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신다. 엄마는 그만큼 내게 전심전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11일(목)
북한 동포들은 약값은커녕 식량 살 돈도 없어서 굶어 죽는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병들어 죽는 것과 굶어 죽는 것은 삶의 질의 차이를 말해준다. 최근에 대지진이 난 아이티 사람들은 건물 잔해에 깔려 죽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을 확률이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높을 것이다.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가는 자들의 공동체에 들어오고 보니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급부상한다.
부모님은 최고의 간병인이자 영양사이자 영적 지도자이다. 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나의 자유를 최대한 보상해주고 계신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14일(일)
오늘은 설날이다. 남편과 아이들이 장장 6시간에 걸쳐 서울에 왔다. 예전 같았으면 남편은 교통체증에 대해 투덜댔을 테지만 내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일본에서 일하다 잠깐 들어온 둘째는 오랜 시간 내 몸을 마사지해 주었다. 다이어트 때문이라곤 하지만 핼쑥해진 얼굴과 습진으로 갈라진 손이 외할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 정도의 외로움과 수고는 참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이에게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일본에 돌아가면 교회도 나가겠다고 하니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막내의 어휘는 날이 갈수록 풍부해지고 있다. 존댓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구사한다. 아이는 부모가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키우시는 것인가 보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16일(화)
이영애 사모님이 병문안을 오셨다. 내 얼굴을 보아야 안심이 되겠더란다. 빳빳한 새 지폐를 봉투에 담아서 격려금이라며 주셨다. 세뱃돈을 받은 기분이 들어 내년엔 꼭 세배드리러 가겠다고 말씀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