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의 한계를 시험하다
입원하고 있을 때나 대전 집에 와 있을 때 남편은 내게 심심하지 않으냐고 묻곤 했다. 아마도 그는 나와 같은 처지가 되면 무료함이 가장 큰 곤란 거리일 거라고 생각했던가 보다. “나는 혼자 있어도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아. 더 집중해서 책을 읽을 수 있고 사람들과 문자로 소통할 수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남편은 참 다행이다, 했다.
하지만 서울 친정에 있을 때는 텔레비전을 많이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떨 때는 내가 어디까지 게을러질 수 있는지 시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떤 환우는 긴긴 하루를 혼자서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환우회 카페에 썼다.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심심함을 느낄 정도라면 (적어도 신체적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므로)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심심한 것이 문제 될 정도라면 자기를 돌보는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가 부족한 것이므로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기다렸던 내일인 오늘을 시간 죽이기를 하며 보낸다는 건 죄악이라고 꼰대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60대가 된 지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무료함과 외로움이 인간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내가 당시에 일기를 쓴 데는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 같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22일 월요일
오늘은 새벽부터 미열이 있다. 오후까지 37도 1부에 머물러 있다. 서울 병원에 전화해 보니 많이 불편하면 내일이라도 올라오라고 한다. 그럴 일이 없기를.
오후엔 대학원 동문인 K 선생과 Y 선생이 방문했다. K 선생은 10년 전 남편을 폐암으로 먼저 보낸 사람이다. 나와 같은 연도에 대학원에 입학한 그녀는 개강 전에 휴학부터 했다. 영문을 몰랐던 학우들은 그녀의 사정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남편의 부고를 접하고야 그녀의 처지를 이해했지만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입학 연도만 같았을 뿐 수업을 같이 들은 적도 없었기에 아직 그녀와 친분이라 할 만한 것을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1년 만에 복학한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학업을 이어갔는데 그 남편의 투병 과정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물어보아야 할지 난감했다. 물어보는 것이 예의인지 모른 체하는 것이 예의인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10년의 세월이 지났고, 내가 중환자 처지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결례가 되지 않을 것 같아 그때 어떻게 견뎌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너무 오래 지난 일이라 기억도 감정도 별반 남아있지 않지만, 환자의 아내로서 사람들이 궁금해하며 문안하는 것이 싫었던 기억은 있다고 했다. 그랬을 것 같다. 환자 자신보다 환자 옆에 있는 사람의 짐이 더 무거웠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아야 하고 환자의 마음을 안심시켜야 하니 말이다. 자기 몸과 마음은 뒷전으로 물릴 수밖에 없었을 테니 시간이 갈수록 환자를 돌볼 에너지도 고갈되어 갔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의 궁금증을 만족시키기까지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23일 화요일
열이 조금 내렸다. 몸이 좀 가벼워졌는데 체온계가 고장이 나서 정확한 체온을 알 수가 없다. 입 안이 살짝 헐었다. 체중이 많이 나간다. 오늘은 다시 현미 생식환을 먹어볼까 싶다.
일기 발췌_2010년 2월 24일 수요일
어제 아침에도 열이 안 내려서 결국 서울로 올라왔다. 병원에서 긴긴 시간을 보내고 친정에 왔더니 입 안이 더 심하게 헐고 허리 통증도 심해져서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어제 병원에서 만났던 사람이 생각난다. 대전에서 오셨다는 60세의 J 여사다. 삭발한 모습과 걸쭉한 목소리 때문에 스님처럼 보이는 그녀는 작년 6월에 다발성골수종 진단을 받고 12월에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았다고 했다. 현재도 격주로 면역증강제를 맞고 있었다.
본인이 진단받고 치료받을 때는 병에 관해 물어볼 곳이 없어 막막하고 두려웠다고 한다. 이제 어려운 과정을 다 지나고 보니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했다. 나보고 당신은 웃는 상이니 잘 견딜 것이고 분명 나을 거라며 덕담을 해주셨다.
그녀에게는 시집간 두 딸이 있는데 딸들이 친정에서 함께 지내며 살림을 돕고 서울 올 때 함께 온다고 했다. 조혈모세포 이식 전까지는 다른 사람 도움 없이 지냈지만, 이식 후에는 감염 위험이 크니 음식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당부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딸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그녀는 자립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그녀에게 비하면 나는 상당히 의존적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부모님과 친정 부모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일기 발췌_2010년 2월 26일 금요일
서울 친정의 내 방은 전적으로 내 편의를 위해 꾸며져 있다 보니 가까이하는 매체의 종류가 달라진다. 서울극동방송은 상업광고가 자주 나와서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데다 TV 보기가 편해지니 채널 서핑을 몇 바퀴씩 하고 있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밤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예솔이와 함께 노는 시간이 없으니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TV를 더 보게 되는 것 같다. 요 며칠은 김연아의 연기를 보느라 더 많은 시간을 TV에게 주었다.
<고스트 위스퍼러>는 내가 좋아하는 미드이다. 방영 시간을 잘 몰라서 채널 서핑을 하다 얻어걸리면 중간에서부터라도 기분 좋게 보곤 하는데 오늘은 두 편을 연속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두 편을 연속으로 시청하니 드라마의 감동이 반감될 뿐 아니라 정신까지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다신 그러지 말아야겠다.
요즘은 마치 내가 어디까지 게을러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심정으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 같다.
환우회 카페에 들어가 보니 어떤 환우는 긴긴 하루를 혼자서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수기에 썼다. 심심함과 무료함을 달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심심함을 느낄 정도라면 (적어도 신체적 고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므로)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생각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심심한 것이 문제 된다면 나를 돌보는 가족들의 노고에 대한 감사가 부족한 것이므로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덧붙여진다.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기다렸던 내일인 오늘을 시간 죽이기를 하며 보낸다는 건 죄악이다.
오늘 김연아가 너무 잘해서 축하하는 뜻으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치료를 시작한 후 처음 마시는 커피였다. 덕분에 새벽 2시가 다 된 시각에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각오한 일이니 그냥 받아들이기로 한다. 내일부턴 하루 일과표를 좀 짜볼까 싶다.
어제 엄마가 외삼촌 이야기를 했던 것이 생각난다. 무연고 독거노인으로 분류되어 정부에서 아파트와 생활비를 받고 사는 외삼촌은 너무 외롭다고, 외로워서 힘들다고 하였단다. 평생 일정한 직업이 없이 무위도식하며 살아온 외삼촌은 국가의 은혜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위험에서는 벗어났으나 외로워서 죽을 위험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이 밤에 외삼촌도 TV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리고 계실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