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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Jul 01. 2024

병원이라는 영토, 질병이라는 연대

    병원이라는 곳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특수한 영토와도 같다. 이 땅에는 그 누구도 들어오길 원치 않지만, 어느 날 갑자기 영주의 부름을 받으면 누구도 거역할 수 없다. 부름을 받은 자는 이곳에 잠시 머물기도 하고 죽을 때까지 붙박혀 있기도 한다. 이곳의 주민이 되면 그는 평생 받아본 적 없는 최고의 서비스를 받지만, 그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단 초청을 받게 되면 그는 충격에 휩싸인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다가, 자신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분노하다가, 자기 처지가 측은해져서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이 영토의 시민이 된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게 된다.

    혼자만 초청받은 줄 알았던 그는 이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들과 연대를 맺기 시작한다. 이 영토에서의 생활은 함께 초청된 사람들과의 연대감이 없다면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삶이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는 더 이상 비참하게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영토 밖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결별한다.


    이 영토 주민들을 영토 밖 사람들과 구분하는 것 중 하나는 시간의 속도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영토 밖 사람들은 하루, 일주일 또는 한 달 안에 마쳐야 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어 쓰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는 서두른다고 빨라지는 일이란 없다. 다음 단계의 치료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몸이 보내는 메시지를 들어야지 마음이 계획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이곳에선 기다리는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 나로선 글쓰기나 독서가 가장 좋은 방법이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일도 좋고.

    전에도 나는 차를 기다릴 때나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독서하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저 기다리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일이 최근엔 전혀 없었다. 자차를 운전하고 다닌 것도 그 원인 중 하나였다. 시간을 절약하는 데는 승용차가 도움이 됐지만 마음의 여유는 잃었던 것 같다.

     

일기 발췌_2010년 1월 29일 금요일 (서울성모병원 입원 나흘째)

    오늘 새벽에 복통의 습격을 받았다. 장염이 아닌가 싶다. 창자를 뒤트는 통증. 배변 후에도 여전히 통증이 남아 있어서 진통제를 맞았다. 아침에 밥이 나와 한 수저 떴더니 즉각 신호가 왔다. 또다시 복통이 시작되었는데 이번엔 구토를 동반했다. 다시 진통제를 맞고 점심은 금식했다. 깨끗이 비워진 창자는 허기 대신 쾌적함을 느끼게 했다.
    엄마가 커피 향을 맡아보라고 침대 옆에 종이 커피잔을 갖다 놓았지만, 그 향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무욕이라는 것이 이런 상태를 말하는가 보다.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은 가진 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 말이 이해되었다.
    S여사가 보낸 문자 메시지에 답을 했더니 왜 이제야 답하느냐고 원망을 한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다는 것이다.   

    2인실로 옮겼다. 옆 침대의 환자는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은, 천안에 거주하는 2남 2녀의 어머니라 했다. 그녀는 별다른 통증도 없다가 건강검진에서 발견한 ‘암’이라는 병명이 농담처럼 들려 헛웃음만 난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도 곧 돌아가셔서 어려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나, 불쌍하게 자랐는데, 하나님은 왜 그러시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그녀 모습이 불쌍하다거나 애처롭다기보다 사랑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의 롤모델이자 대학원 선배인 윤현영 선생이 전화를 주셨다. 한마디 할 때마다 “이소라 선생님” 하고 불러주시는 목소리를 들으니 알고 지낸 십여 년의 세월 중 지금이 그녀와 가장 가까운 시간이라고 느껴졌다. 서울깍쟁이 특유의 차가움이 살짝 느껴지는 그녀는, 너무 좋아하고 존경하면서도 가까이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과 가까워지는 경험, 그것은 살면서 내가 가장 열망하였던 일이었음을 지금 이 순간 깨닫는다. 내가 중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윤선생과 나 사이의 벽은 그처럼 쉽게 허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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