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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물의 친교 03화

흔적 없는 자취들

이 또한 존재의 방식

by 소라비

물에는 드나든 흔적이 남지 않는다. 허물처럼 벗어둔 옷이나 몸만 빠져나간 침대와는 다르다. 누가 머물렀는지,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는다.

매정하기도 하다. 어떤 자취도 허락하지 않고, 계절의 변화나 생의 주기와도 무관하다. 아무리 헤엄쳐도 물 밖에 서면, 그 안에서의 시간은 이미 씻겨 내려간 듯하다. 그래서 기록한다. 함께한 한철이나마 기억하려고. 적어두지 않으면 내 행위가 소멸될 것 같아서.


물을 보며 생각했다. 흔적이 없으면 의미도 없는 걸까?

그 질문을 하다 보면, 영화 <헤어질 결심>이 떠오른다. 여자는 바다에 자신의 몸을 묻어 남자에게서 잊히길 끝내 거부했다. 그 강렬한 엔딩 이후, 나는 오래도록 답을 찾고자 했다. 남겨진 남자에게는 무엇이 더 나았을까.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걸 확인하고 더 이상 헤매지 않는 것. 아니면 차라리 모른 척하며 희망을 놓지 않는 것. 처음에는, 그 끝을 조금이라도 더 일찍 마주하는 편이 덜 괴로울 거라 여겼다.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채 무작정 기다리는 막막함은,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와도 다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면, 그 모호함이 그를 살게 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분명함 속에서 실낱같은 가능성을 붙드는 간절함이 남자에게는 필요하니까. 그래야 살아갈 수 있으니까.

본디 흐르는 게 물의 속성이지만, 고이기도 한다. 내가 몸을 담그는 수영장은 큰 물길이 없어 멈춘 것처럼 보여도 온갖 다채로운 표정을 짓는다. 손발을 저어 나아갈 때마다 찰랑이고, 소용돌이치며, 빛을 받아 일렁인다. 고요를 가장한 채 살그머니 생동하며 찰나마다 물결은 퍼지고 펴지기를 반복한다. 멍하니 바라보면 어느새 평정이 깃든다.

수영장 위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날마다 떠오른다. 바람에 흩날린 나뭇잎이거나 새의 깃털 혹은 꽃잎 같은. 그것들은 바닥까지 가라앉지 않는다. 수면 위에 잠시 부유하다 때가 되면 그물망에 걸린다. 물에 흠집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사라지지만, 분명 거기 있었다.

영원하지 않다고 덜 소중한 건 아니다. 오히려 짧기에 애틋하다. 잠시 머물러도 잔잔한 파동을 남기고 흩어지는 인연들. 마침표를 찍지 못한 헤어짐이라 오히려 한가닥 희망을 갖게 하는 관계. 금세 부서질 걸 알면서도 아스라한 무늬를 그리고 가는 사람. 표식도 새기지 못한 채 스러진 순간들조차, 물은 모두 받아 안았다. 그 모든 무형의 자취들 또한 존재의 방식이었다.


세상 어디에나 흔적은 있다. 내가 미처 보려 하지 않았을 뿐. 오늘도 물이 되어 가려진 의미들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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