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
공용 수영장에서 배영을 하려면 늘 눈치를 보게 된다.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힐까 동작을 마음껏 펼치기 어렵고, 앞이 보이지 않으니 불편을 줄까 신경이 곤두선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런 제약에서 자유롭다. 그래서 어느새 배영이 필살기가 되었다.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나만큼 정확한 움직임으로 더 빨리 이 영법으로 수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기록도 자유형보다 더 낫다.
몸을 뒤로 눕히고 하늘을 마주한다. 두 어깨는 쉴 새 없이 풍차처럼 회전한다. 팔은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가, 물을 역으로 밀어 돌리고, 순식간에 귓가를 스쳐, 다시 수면 밑으로 파고든다. 다리는 팔의 속도를 쫓아 분주히 물장구를 친다. 상하체가 톱니바퀴 돌 듯 조화롭게 맞물려야 다리의 킥이나 팔의 스트로크가 잉여로 남아 헛돌지 않는다. 허리는 꼿꼿이 펴고 살짝 힘을 주면 몸의 중심이 곧추서서 반듯하게 지탱된다. 그래야 어깨와 팔, 둔부와 다리가 허리를 중심 삼아 편안하게 움직일 수 있다. 목을 포함한 다른 부위는 자연스럽게 물에 맡긴 채, 허리만 치켜들어 평평하게 수면과 평행을 이룬다.
배영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으로 가득했던 나에게, 충격처럼 다가온 한 문장이 있다.
계속 살아가려는 듯 우리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로 뻗은 팔로도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다음의 일이었다
이제재, 《글라스드 아이즈》, 「배영」
물과 수영에 관한 글을 적지 않게 읽었지만, 이런 강렬한 조우는 처음이었다. 내가 좋아하고 가장 잘하는 영법을 누군가가 멋지게 녹여냈다니, 부러움과 함께 살며시 질투가 일었다. 시인이 물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리는 없을 텐데, 왜 난 이런 표현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아마 ‘재능’ 일 것이다. 시인은 평범한 움직임 속에서 진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정확한 언어로 붙잡았다.
이전까지 나는 배영을 그저 훈장으로만 여겼다. 영법의 기술을 익혔고, 물의 저항과 추진력을 체화했다. 배영은 정해진 루틴이자 마음의 평정을 위한 명상 정도였다. 만족감에 그쳤을 뿐, 그 이상의 울림은 길어 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시인은 달랐다. 익숙함 속에서 놓쳤던 본질을 기어이 찾아내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했다. 습관처럼 반복하던 동작에서 어둠과 막막함을 뚫고 나아갈 희망과 의지를 발견했다. 깊은 통찰을 통해 시의 언어로 세상과 나눴다. 이는 분명, 경험을 넘어서는 재능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런 문장을 지어내지는 못했지만, 꾸준히 수영을 해온 덕분에 그 시구의 깊이를 알아볼 안목은 키웠다고. 계속 헤엄치다 보면 언젠가 나만의 무엇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를 우직하게 쥐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는 일 또한 가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물을 베고 눕는다
그 문장의 주인에게 감사하며
뒤로 뻗은 팔로도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
다음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