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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물의 친교 01화

프롤로그 | 느림의 사치

수영 수양

by 소라비

이사 올 때부터 함께였다. 북미 어느 동네에나 흔한, 집에 딸린 수영장. 강낭콩인지 콩팥인지 모를 특이한 형태다. 무난한 네모라면 더 곧게, 더 쉽게 헤엄칠 텐데. 왼쪽 끝은 내 키의 몇 배로 깊고, 오른쪽은 얕다. 작은 하늘색 타일이 바닥 전체를 메우고, 짙은 남빛 띠가 빙 둘러져 있다. 뒤편 화단은 물 안에서 올려다볼 때마다 시선을 붙잡는 포컬 포인트가 된다.


개인 수영장의 좋은 점은 움직임의 속도를 내 맘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속도란 빠름이 아니다. 오히려 한껏 느림을 부리는 여유야말로 소유의 진짜 사치다. 남들과의 흐름을 맞출 필요가 없으니 매 호흡마다 충분히 음미하며 정성껏 몸을 움직인다. 더 잘하려는 욕심보다는 더 즐기려 한다. 빠름을 내려놓고 기꺼이 느림에 몸을 맡기면, 운동을 넘어 관찰의 장으로 탈바꿈한다.


물속에서는 오롯이 관조자가 된다.

적신 몸이 오감을 깨운다.


구름

물결무늬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뭇잎

만개한 꽃의 향기

몸에 감기는 물의 온도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과 달

어디론가 날아가는 새들의 무리

흩어지고 피어나는 빛의 일루미네이션


그리고 호흡마다 느껴지는 공기의 무게와 밀도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유독 밝게 빛나는 별인가 싶어 잠시 설레다가, 비행기인 걸 알고는 우주선이라 상상해 본다.


보통 5월에 열고 10월에 닫는다. 수영을 워낙 좋아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한 시간 남짓 헤엄친다. 아예 머리를 텅 비우거나 오직 단 하나의 생각에 몰입한다. 방해받을 일이 없으니 고민하던 문제에 골똘히 집중할 수 있다. 신기하게도 물 안에서 건져낸 생각들은 꽤 쓸만하다. 복잡했던 문제가 자연스럽게 실마리를 찾거나, 답답했던 마음이 해소되는 경험을 자주 한다. 몸과 부딪혀 흘러나오는 청아한 물의 선율은 마음을 진정시키는 명상 음악 같다. 그러니 수영은 내게 수양이기도 하다.


야외 수영장의 탐구는 끝이 없다. 예정했던 연재는 잠시 미루고, 우선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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