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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물의 친교 04화

살갗을 적신 후에

빗나간 추측들

by 소라비

물은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도 눈으로만 봐서는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1미터인지 10미터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착각하기 쉽다. 집 마당의 작은 풀장과 올림픽 규격의 수영장은 물에서 뿜어지는 힘이 확연히 다르다. 바깥에서 보면 둘 다 한없이 맑다는 게 오히려 함정이다. 투명함을 뚫고 몸 전체를 담가 직접 부딪혀야만 수압을 체감할 수 있다.

물의 온도 역시 겉보기만으로는 파악하기 힘들다. 같은 바다라도 바로 몇 발짝 차이로 수온이 갈리기도 한다. 수영장은 언제나 일정 온도에 맞춰져 있어 수치상으로는 늘 같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매번 달라진다. 해와 바람에 따른 물의 상태와 그 못지않게 변화무쌍한 내 몸이 만나 어떻게 반응할지는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체감 온도는 수영을 하는 와중에도 수시로 변한다. 보통 처음 입수할 때가 가장 차갑고, 몸이 풀리면서 서서히 올라간다. 어찌 보면 온도란, 물과 내가 맞닿은 바로 그 찰나에만 감지되는 감각이다.

세상에는 스스로 겪어야만 그 속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수년간 데면데면하게 지낸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만남을 일부러 피해 왔다. 유독 그녀의 나쁜 점만 과장해 말하던 친구 때문에 선입견에 사로잡혀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공적인 모임에서 마주쳐도 늘 색안경을 끼고 재단하기 바빴고, 선의를 받아도 뭔가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러다 최근의 사건을 통해 상대방의 진짜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한두 번이 아닌 지속적인 행동으로 드러난 진심이었기에 더욱 믿음이 갔다. 어리석게도, 그동안 그 관계에서 얻을 수 있었을 값진 경험을 밀어내며 살아온 셈이다. 그녀라는 물은 생각보다 더 깊고 깨끗하며 따뜻했다.

물에 대해 알게 된 모든 것은 몸을 물에 담그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 전의 추측들은 대부분 빗나갔다. 판단은 물이 살갗을 적신 후에 해도 늦지 않다. 직접 마주하는 순간은 늘 새롭게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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