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의 응원
마당 가득한 수영장 뒤로, 길고 좁은 화단이 병풍처럼 자리하고 있다. 때맞춰 피어난 꽃들이 물속을 헤엄치는 동안 나의 낭만적인 동반자가 되어준다.
아직 쌀쌀했던 지난 5월, 철 이른 수영의 첫 벗은 튤립이었다. 초록 줄기 끝에서 새빨간 꽃봉오리들이 봉긋 고개를 내밀었다. 선명한 채도의 튤립들을 수중에서 올려다보며 물의 한기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이번엔 또 어떤 빛이 솟아날까, 날마다 궁금했다.
6월은 주로 배영을 했다. 호흡이 자유로워 라일락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풋풋한 첫사랑 같은 단내가 밤이 깊어질수록 짙어졌다. 낮에는 행인이나 새들과 나누던 향이, 밤수영 땐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물에 누워 까만 하늘을 쳐다보면, 나는 어느새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밤하늘을 누비는 인어가 되어 있었다. 라일락 송이를 닮은 촘촘한 잔구슬들이 드레스를 수놓았다. 움직일 때마다 구슬 장식들이 서로 부딪치며 물결처럼 맑게 찰랑였다.
7월은 장미가 만발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진한 향을 뿜었지만, 아쉽게도 헤엄치는 내게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몸은 물속에 두고, 자유형으로 머리를 오른쪽으로 젖히는 찰나에만 그 도도함을 훔칠 수 있었다. 머리가 다시 잠기며, 수영장 안이 연분홍 장미꽃잎으로 가득 차는 황홀한 상상에 빠졌다.
8월인 지금은 능소화가 한창이다. 옆집 발코니를 타고 주황색 덩굴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평영으로 정면을 향할 때만 시야에 들어온다. 오렌지빛 노을을 듬성듬성 엮은 듯한 능소화를 눈에 담으려고 일부러 고개를 한껏 치켜든다.
늘 보던 꽃들도 가쁜 호흡 중에 보게 되면 점점 각별해진다. 처음엔 단순한 배경이었지만, 이제는 나를 주시하는 관중이 되었다. 수영 경기장에서 형형색색 복장의 치어리더에게 애정 어린 박수갈채를 받는 기분이다.
꽃들이 내게 그러하듯, 우리도 서로에게 이런 응원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과한 기대나 부담을 내려놓고 그저 곁을 내어주는 순수한 마음으로.
삶에는 꼭 가까운 사이가 아니어도 심적으로 기댈 수 있는 관계가 있다. 날마다 마주하는 수영장 옆 화단처럼,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 존재 자체로 충분한 연결감. 인생이라는 긴 여정을 유영하는 동안, 오직 가족이나 몇몇 지인에게서만 격려를 주고받는다면 그 무대는 얼마나 황량할까. 경계를 넘는 박수가 그 빈 곳을 채우면 좋겠다.
쓸모로 엮인 관계는 한때의 쓰임을 다하면 사라지고 만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친밀한 이름이 붙은 인연들조차 정해진 역할을 마치면 옅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선뜻 건네는 치어리더의 격려라면 소멸할 이유가 없다.
가끔은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사심 없는 지지 하나로 힘을 얻게 되는 순간이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 주저 없이 내게 손길을 내민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루가 덜 무너지고 더 살만해진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기척이 닿으면 마음이 잔잔히 데워지고 잠시나마 세상이 환해진다. 거창한 약속도, 무거운 다짐도 굳이 필요치 않다.
끝내 우리에게 남을 가장 사람다운 연결은, 투명하고 자유롭게 서로를 응원하며 염려하는 마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