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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물의 친교 09화

물빛 언어

조각난 단상들을 품고

by 소라비

수영은 스트로크와 발차기로 짓는 문장과 같다. 두 동작이 자음과 모음처럼 제대로 맞물려야 낱말이 되고, 의미가 생겨난다. 팔과 다리의 연속적인 리듬은 수면 위를 미끄러져 나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곧게 뻗은 팔이 발단을 열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전개가 이어진다. 물살을 가르며 절정에 이르러, 발차기로 결말을 맺는다. 피어나는 물방울은 영감처럼 반짝이고, 턴으로 글을 다듬으며 다음 문장을 향한다.


수영의 영법은 문학 장르와도 닮았다. 평영은 담백한 산문 같아 큰 기교 없이 흐른다. 배영은 한밤에 펼친 시집이다. 하늘과 별을 마주하고 누워 자연의 시어를 더듬는다. 자유형은 정교하게 엮인 소설이다. 한 치의 허투루 없이 모든 동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결국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책을 덮어도 남는 여운이 물결처럼 번진다.


온몸이 완전히 빠져들어 빈틈없이 휘감기는 경험이 수영 말고 또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들 때마다 빠지다라는 동사의 깊이를 곱씹는다. 끈덕지게 나를 감싸는 물은 어느새 나와 하나의 덩어리로 얽혀 더 이상 분리되거나 벗어날 수 없다. 잠긴 세계에서는 숨이 가빠오고 소리는 둔해지며, 빛조차 흐릿하게 굴절된다. 사랑에 빠지듯, 속수무책이 된다. 무심코 사용하지만 의외로 묵직한 단어다.


물은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휘어지다가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이런 유연함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알게 된 것은 오른팔 부상과 수술을 겪고 난 후였다.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딱딱한 깁스에 갇혀 두 달 넘게 지내며, 휨을 매 순간 갈망했다. 세상의 수많은 뚜껑들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고, 젓가락질조차 불가능했다. 모든 일상이 난관이었다. 덕분에 내 소원은 아주 소박해졌다. 조금이라도 구부러지는 팔로 비누거품을 내어 손을 문질러 닦는 것. 단 1도의 각도라도 휘어질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당시 내게는 바로 초능력이었다.


물 안이라는 환경은 자연스럽게 몰입을 유도한다. 평소에는 이것저것 동시에 하지만, 수영할 때만큼은 오직 헤엄만 친다. 달리기를 할 때는 주변을 둘러보거나 산책 나온 이웃들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수중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물과 나, 단 둘의 공간에서 호흡과 동작에만 몰두하며 오로지 느낀다. 외부의 방해를 완벽히 차단하고 온몸을 전부 내맡겨 얻는 것이 완전한 몰입이다.


오늘도 헤엄을 친다. 팔을 뻗어 물길을 연다. 어떤 생각이 금세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발차기를 한다. 부유하던 표현 하나가 미끄러져 달아난다. 이제 다시 땅을 딛는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조각난 단상들을 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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