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는 사람
오랜 해외생활을 하며 우리나라 말로 글을 쓴다는 것.
아마 그건 깊은 바다에 몸이 둥둥 뜬 상태와 맞먹겠다. 발을 딛고 싶어도 키가 닿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수심은 오히려 더 아득해진다. 간신히 바닥에 닿는다 해도, 그곳은 단단한 땅이 아니라 모래이니 더 깊숙이 빠져들어갈 테다.
한글을 사용할 기회도 없고 일에 치여 글을 놓치고 살아왔다. 그래서 쓸 때마다 물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다. 건져 올린 말들이 과연 얼마나 묵직한지 도대체 알 수 없다. 내 글에도 무언가 손끝에 와닿는 질감이나 밀도가 느껴지는지, 헛된 발버둥만 치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문화가 다르다는 현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학생 때로 멈춰있다. 공백의 날들을 메울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렵다.
먼 길을 돌아온 나라도 작가의 꿈을 꿀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심이 들 때면 처음으로 돌아간다. 브런치 작가로 인정받던 그날로. 한국에 아무 소유도 없는 내게, 내 글의 집이 허락된 것 같았다. 그때의 기쁨을 떠올리며 조급해하지 않기로 한다. 비행기로 열다섯 시간, 모국어와 나는 꽤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 거리를 물고기의 헤엄으로 기어이 쫓아가본다. 모어로 글쓰기란, 뿌리를 잃고 부유하는 나를 달래기 위한 회유인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불안을 여전히 안고, 내 일상의 물가로 향한다. 수영장 가장 얕은 쪽 벽 아래, 작은 구멍이 있다. 알맞은 온도로 데워진 물이 솟아나는 시작점이다. 그 모퉁이 근처는 언제나 따스한 반면, 몇 발짝 건너편은 싸늘하다. 온기가 퍼져나가기엔 수영장은 제법 넓고, 낡은 펌프의 느린 회전은 물을 고르게 섞어내지 못한다.
양쪽은 서로 다른 온도를 품은 채 공존한다. 내가 헤엄치기 시작하면 물도 따라 깨어난다. 따뜻한 쪽에서 출발해 차가운 끝으로 이동한다. 냉기에 닿을 때면 온몸이 움츠러들고, 방금 전의 포근함으로 거슬러 되돌아가고 싶다. 꾹 참고 이 끝과 저 끝을 몇 번 왕복하다 보면, 얼추 수영장 전체가 비슷해진다.
내 몸은 두 영역을 잇는 매개체가 된다. 익숙함과 낯섦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이민자인 나의 삶과 겹쳐진다. 두 나라를 연결하려는 바둥거림이 애틋하고 안쓰럽다. 한 곳에 뿌리내리는 나무로 정착하는 대신, 끊임없이 유영하는 물고기가 되었다. 이 깊이 저 깊이를 누비며, 물 한 겹 한 겹의 서로 다른 감촉을 몸에 새긴다.
따스함과 차가움이 뒤섞인 기운은 어느 순간 한데 녹아들어 더 이상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냉기와 온기 사이의 ‘다름’은 점점 흐릿해지고, 그저 ‘하나 된 물’만이 남는다. 온 힘을 다해 헤엄치다 보면 체온이 올라가, 더 이상 주변의 상태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이제는 물이 아니라 내가 온기가 된다.
허물어진 경계를 넘나들며 물을 나른다. 반복되는 순환 속에 무언가 변해간다. 나인지 물인지 혹은 둘 다인지. 그저 변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감지하며,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두 세계가 어우러져 새롭게 물결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