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끝 독백
밤 아홉 시. 하루의 열기가 식고 고요함이 내려앉았어. 수영하기 좋은 시간이야. 보라색 수영복을 입고 수경과 스마트워치를 챙겼어. 타월까지 어깨에 걸치니 물과 만날 준비가 끝났군.
밖이 깜깜해졌네. 전등을 켜면 불빛에 달려들던 나방들이 9월이 되니 자취를 감췄어. 야외엔 달력도 안 걸어놨는데, 계절이 바뀐 걸 어떻게 알았을까. 수영장까지 딱 다섯 발자국. 들어가기 전에 잠깐 물가에 앉아서 이 고즈넉한 풍경을 누리고 싶어.
시간과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시간은 삶의 마음이고 계절은 삶의 몸인 것 같아. 보이지 않게 흘러가는 시간은 잔잔한 물결 같다가도 소용돌이를 치는 마음이고, 눈에 보이는 계절은 옷을 입고 벗으며 몸의 표정을 바꿔가니까.
자연의 모든 게 고유하지만 특히 바람은 모조가 불가능해. 매일 야외에서 헤엄치다 보면 이 사실을 온몸으로 깨우치게 돼. 빛은 인공으로 모방할 수 있어도 바람만큼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거든. 선풍기나 에어컨으로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지금처럼 실외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져. 그저 바람에 온몸을 통째로 맡기는 수밖에.
가을밤의 감각은 정말 명징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비가 내린 후 땅에서 나는 특유의 흙냄새, Petrichor가 코끝을 스치거든. 9월 공기엔 그 알싸한 향이 은근히 배어 있어. 풀벌레 소리는 예민한 내 귀가 좋아하는 데시벨에 맞춰 깔렸어. 살며시 발가락을 담그고 인사를 건네볼까. 물의 기운이 발끝을 타고 올라오네. 오늘의 온도와 바람, 습도와 일조량이 합해져서 지금 이 찰나의 물이 된 거야. 내 몸과 만나면 어떻게 반응할지, 물 앞에 앉을 때마다 설레는 이유지.
들어가 볼까. 먼저 평영으로 물과 몸을 깨워야지. 숨겨진 날개를 활짝 펼치듯 수평으로 커다랗게 반원을 그려야 해. 팔은 수면과 가장 가까운 자세를 내내 유지하는 게 중요한데, 힘들다고 밑으로 기울이면 안 되지. 이제 빛의 일루미네이션을 즐기자. 실내에서 새어 나온 한 줄기 빛을 타일이 재빨리 낚아채. 그 빛은 물결 위에서 장난꾸러기처럼 여러 갈래로 흩어져 현란한 무늬들을 그려. 인공의 빛도 물의 자유를 빌리면 이렇게 찬란할 수 있어.
이번엔 절제와 돌진의 자유형 차례야. 마지막 한 동작까지 허투루 하지 말고 정확해야 해. 몸에 힘을 주라는 게 아니라, 집중력을 놓지 말고 정성껏. 오른팔을 돌릴 때 화단을 봐. 그동안 치어리딩을 해준 꽃들은 이미 사라졌지만, 이제 풍성한 잎사귀를 흔드는 나무들이 있어. 그 사이로 달도 보이고. 자유형 동작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오른쪽이 차지해. 왼쪽은 그저 기울기를 잡아주며 조화를 이룰 뿐이야. 좌우가 동일하게 포개지는 평영이나, 맞물려 돌아가는 배영과는 다르지. 서로 불완전한 양쪽이 만나 하나가 되는 순간, 'You complete me!' 양팔이 서로에게 속삭이는 것 같아.
이제 배영으로 물 위에 누워보자. 밤하늘의 모든 매력이 한눈에 들어와. 머리 위 가장 밝은 별을 등대 삼아 뒤로 뻗은 팔로 나아가는 거야. 별빛을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으니까. 계절이 바뀌는 이맘때쯤이면 검푸른 하늘에 솜사탕 같은 구름이 가득해. 누가 막 베어 먹고 있는 것처럼 솜사탕이 자꾸 변해가네. 구름도 나도 계속 움직이니까 모양이 순식간에 달라져. 성긴 구름이 넓게 드리워지면 우주를 유영하는 기분이 들어. 흑백의 오로라 속을 로켓이 된 몸이 떠다니는 거야.
직각으로 팔을 높이 쳐든 순간이 바로 하이라이트야. 물줄기가 휘감고 있던 팔에서 투명한 물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져. 그 알갱이들은 티 없이 맑고 명랑한 결정체야. 어릴 적 미술 시간에 도화지에 물감을 떨어뜨려 후후 불던 기억이 나. 까만 하늘의 스케치북 위에는 박힌 별 하나와 수묵화처럼 윤곽이 흐릿한 나무, 그리고 속절없이 낙하하는 영롱한 예술이 담겼어.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생생한 이 작품 때문에 야간 수영을 멈출 수 없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물 밖으로 나오자 서늘한 밤공기가 젖은 살갗에 달라붙어. 타월로 몸을 감싸니 하루를 접는 기분이야. 잘 마무리했어. 별 몇 개가 더 드러나고 구름은 빗살무늬로 흘러가. 내일 밤에도 이런 낭만에 젖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