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너머 아득히
수영장 한쪽 끝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면, 겨우 몇 미터 거리가 영원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몸이나 마음이 편치 않은 날에 그렇다. 몸이 고되면 오히려 낫다. 몇 번 왕복하다 보면 물에 씻기듯 개운해지니까. 하지만 마음이 복잡할 때는 상황이 달라진다. 수영장 바닥에라도 가라앉고 싶은 갑갑한 심정이라면 수영이 제대로 될 리 없다. 그 먼 끝을 응시하자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언제쯤 저기에 닿을까. 내가 헤엄친 적이 정말 있었나. 갑자기 모든 게 낯설어진다.
그런 날엔 따로 요령이 있다는 걸 안다. 거리감이라는 개념을 잠시 지워버리면 한결 수월하다. 까마득한 저 너머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자유형으로 비스듬히 보거나 아예 머리를 돌려 배영하기. 굳이 평영으로 앞을 보지 않고, 옆이나 위의 풍경으로 더 오래 채우면 되니까.
미련하게도 나는 요령을 부릴 줄 모른다. 각 영법의 정확한 배분을 맞추려는 집요함 때문이다. 피할 방법을 알면서도 정해진 시간 동안 정면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막막함에 가슴이 조여 오고, 자꾸만 밑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허우적댄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수영장 물도 들이켠다.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동작이 과장된다. 그렇게 간신히 한 랩을 마치고, 돌고 또 돌아, 오늘치 평영을 모두 소화하고서야 다음으로 넘어간다. 정면 돌파든 우회든 각자 맞는 방식으로 계속 움직여 나간다면 결국 같은 끝에 다다를 테다.
5월부터 하루하루 쌓인 물속의 시간이 올해도 벌써 백 회를 넘었다. 그 끈기가 나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다. 거창한 의지로 시작한 게 아니었다. 그저 수영복을 챙기고, 수영장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발을 담그고, 수영복을 빨아 너는 작은 행동들의 합이었다. 하기 싫은 날에도, 가슴에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운 날에도 멈추지 않았다. 존경하던 어른의 부고를 들은 날 역시, 얼굴을 물에 묻고 나만의 의식으로 그분을 애도했다.
살아가는 일도 수영과 비슷하지 않을까. 인생을 통째로 바라보면 주눅이 들고 좌절한다. 어차피 정해진 결말인데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에 짓눌린다. 그러나 한 해, 한 달, 하루, 한 시간으로 잘게 쪼개면 해볼 만하다. 아무리 힘들어도 10분쯤은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삶을 한 조각씩 나누는 일은 생각보다 단순할 수 있다. 새로운 지식을 찾아 헤매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답을 하나씩 차근차근 실천하는 것. 가까스로 버텨낸 그 소중한 10분을 끝없는 사색에 할애하는 대신, 그동안 얻은 깨달음들을 이제 몸이 이끌게 하면 어떨까.
백 번을 헤엄쳤지만, 물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아무런 자취 없이 스러질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꾸준히, 조금씩 해나간다.
물을 정복하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수영장에 들어선 적 없다. 놀이로만 여긴 적도 없다. 수영장이 있어서 들어섰고,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아낌없이 유영할 뿐이다.
지금 이 순간들이 모여 삶이 되는 거라고 다독이며
한 걸음씩. 한 스트로크씩. 한 킥씩.
딱 하루치만큼만
오늘을 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