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이 도시의 겨울은 사람이 아니라 곰이 살아야 마땅할 날씨다.
사흘 내내 퍼붓던 눈이 잠시 멈춘 어느 오전, 설거지를 하다 창밖을 봤다. 옆집 아버지와 아들이 삽을 들고 나왔다.
새하얀 맨살.
중학생 아이가 팬티 차림으로 눈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 추위와 싸우는 게 아니라 따뜻한 수영장에 들어와 있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평온함이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아버지는 옆에서 자기 몫의 삽질을 했다. 말리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같았다. 순간 내가 곰과 펭귄이 사는 나라에 잘못 들어온 건 아닌가 싶었다.
나도 나름 이 계절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 내가 졌다.
올해는 정말 혹독했다. 영상인 날이 드물었다. 오래된 차에 시동이 안 걸려서 배터리를 새로 갈아야 했다. 675불. 자다가 뭔가 미끄덩한 게 얼굴에 흘러서 깼다. 비릿한 냄새도 났다. 피였다. 코피가 철철 흘러서 베개와 침대를 적셨다. 가습기를 틀고 잤는데도 소용없었다. 곧바로 대용량 가습기를 새로 샀다. 겨울은 추우면서 비싸기까지 하다.
한 번 크게 데이고 나니 매일 아침 커튼을 열기가 겁났다. 얼마나 쌓였는지, 제설차가 언제 올지, 바람은 또 얼마나 셀지. 눈이 그날 하루를 결정한다.
토론토의 겨울은 햇살에 속는 날이 많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해가 쨍쨍한데 기온은 체감 영하 30도. 이런 날에는 밖으로 나서는 순간 눈물이 맺힌다. 흐르지는 못한다. 나오자마자 얼어버리니까. 곧이어 숨 쉬기가 힘들어진다. 폐가 에이고 살갗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다.
11월부터 4월. 어떤 해에는 5월까지 추위가 이어진다. 초반엔 들뜬다. 첫눈 사진을 찍고, 크리스마스 마켓을 쏘다닌다. 1월부터는 슬슬 지친다. 2월엔 지긋지긋해진다. 3월이면 잠에서 깨자마자 "제발 좀 그만"이라는 짜증이 튀어나온다. 그래도 온다. 펄펄.
그 사이 한국에서는 개나리가 폈다 지고, 벚꽃축제가 열렸다 끝나고, 장미가 한창일 무렵이다. 여기는 여전히 겨울왕국인데.
그래도 좋은 순간은 있다. 뽀드득. 겹겹이 쌓인 눈을 디딜 때 나는 소리.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긴 부츠를 신고 발에 무게를 실어 꾹 찍어 누른다. 갓 갈아 끼운 침대시트 위에 누울 때처럼 상쾌하다.
세상이 하얘지면 모든 게 선명해진다. 뼈만 남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다람쥐가 타잔처럼 날아다닌다.
언젠가 다람쥐가 나무에 오르는 연습 현장을 목격했다. 고목을 향해 돌진하고 올라가고 내려오고 다시 돌진하기를 반복했다. 멀리뛰기 선수 같았다. 저만치서 거리를 가늠하며 조정해 나갔다.
그날 이후로 그 귀여운 생명체가 달리 보였다. 거침없이 나무를 타는 모습 뒤에 노력하던 장면들이 포개졌다.
추워도 사람들은 Tobogganing을 하러 나온다. 언덕 꼭대기에서 미끄러져 내려올 때마다 웃음소리가 터진다.
눈이 쌓여도 놀이터는 붐빈다. 얼어붙은 미끄럼틀과 그네에 아이들이 매달린다.
도심 곳곳에는 야외 스케이트 링크가 열린다. 크게는 시청부터 작게는 동네 아파트까지. 빌딩 불빛 아래서 빙판을 가른다.
아쉽다. 딱 어묵 국물 마실 타이밍인데. 하지만 길거리엔 아무것도 없다.
한국의 겨울은 추웠지만 포근했다. 토론토는 춥고 얼었고 비었다.
한참을 놀고 나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눈 치우기. 안 하면 벌금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계절에 맞선다. 삽을 들거나 제설기를 돌리거나 인력을 고용하거나. 드라이브웨이 밑에 아예 열선을 깐 집도 있다. 노동 대신 자본. 멋지다. 그 집 앞만 깨끗이 녹았다.
지쳐갈 무렵엔 연대감도 생긴다. 곰도 아닌 우리가 여기서 버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웃과 연결된다. 가끔은 옆집 마당을 치워주고, 눈에 빠진 차를 함께 밀기도 한다. 어떤 데는 우리보다 30센티 더 많이 왔다더라. 영하 50도라던데 거긴 어떻게 사냐. 시답잖은 수다를 떨며 서로를 위로한다.
이제 3월이다. 처마 끝 고드름이 짧아지고 해가 길어진다. 확실히 한 풀 꺾였다. 아니, 그러면 좋겠다.
한국에는 곧 벚꽃 소식이 들리겠다. 토론토의 벚나무는 손에 꼽을 정도라 봄이 초라하다. 언젠가 한국 가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 사이를 걷고 싶다.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어서 그게 CG라고 우기고 있다.
팬티 소년한테는 상대가 안 되지만, 나도 겨울 하나를 더 견뎠다.
Toboggan
뾰족한 날 없이 바닥면이 넓고 평평한 썰매.
Snowed in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집이나 건물 안에 갇혔을 때 쓰는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