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DoG Oct 29. 2020

스타일리스트 막내의 해외 출장

장장 12시간의 긴 비행이었지만 나는 하루를 꼴딱 세서인지 이코노미 석에서도 쉬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미국 LA에 도착해보니 화창한 아침이었고, 비행기에서 푹 잔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했다. 물론 내가 괴롭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비행기에서 내린 첫날부터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었고, 숙소에 가자마자 의상을 정리하고 팀장님과 한 선배는 촬영장으로 출발했다. 다른 한 선배는 팀장님이 쉬라고 했고, 나에게는 의상 정리를 완료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나는 그때부터 너무 두려웠다. 내가 옷을 잘 챙긴 게 맞을까, 혹시나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까... 안절부절못하던 나는 팀장님이 떠나자 마자 의상실에 들어가서 중얼거렸다. “아 씨발... 좆 됐다... 씨발 좆 됐다 좆 됐다 어떡하지 좆 됐다...” 그때 저쪽 구석에서 킄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의상실은 우리 팀 선배들과 메이크업 스태프분이 숙소로 사용하는 방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덕분에 잠시 동안 쪽팔림에 긴장이 풀릴 정도였다. 메이크업 스태프분은 이번 뮤비 때 처음 뵙는 분이었는데 이 계기로 갑자기 친해지게 될 정도였다. 그분이 뭐가 그렇게 좆 됐냐고 물었고,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모르던 나는 그냥 다.... 정리해야 돼서 그랬다고 둘러댔다. 


신발은 사이즈와 스타일별로 나열해 놓았고, 옷은 셔츠와 니트 자켓 등으로 구분해서 걸어 놓았다. 사실 그렇게 정리를 해 놓은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팀장님은 매일같이 당일에 착을 맞추셨고, 항상 “베트멍 셔츠 가져와” 이런 식으로 옷을 불렀다. 나는 아직 명품 브랜드가 익숙하지 않아서 내가 정리하고 내가 짐을 쌌음에도 헤매었고, 선배들은 그런 나를 불쌍해서인지 보듬어 주었다. ‘베트멍이 무엇인가, 그리고 베트멍 셔츠는 하나인가?’ 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선배들은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거지? 그럼 나만 이상한 건가? 나는 점점 스타일리스트 일에 자신감을 잃어만 갔다. 


촬영을 하는 아이돌 멤버들은 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막내인 멤버만 나와 같은 나이였다. 나는 워낙에 말수가 적은 편이기도 했고, 낯을 많이 가려서 다른 스텝들과 어울리기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연예인과는 얽히지 않는 게 여기서 더 오래 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괜히 말을 걸어보고 싶은 것도 억지로 참고 일을 했다. 그런데 이번 뮤비 촬영에서는 같은 숙소에 24시간 같은 일정으로 움직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게 되었다. 물론 그전에도 대화는 했지만 내가 눈도 안 마주치고 대답만 하는 바람에 그냥저냥 어색하기만 했다. 확실히 멤버도 사람이다 보니 잘 챙겨주고 싹싹한 멤버가 있는 반면 무뚝뚝하고 말 수 없는 멤버도 있었다. 그래도 내가 항상 고마웠던 점은 다른 연예인들에 비해 너무나도 옷에 대해 관대하고 착했기 때문이다. 물론 연차가 아직 덜 차서 그럴 수도 있지만, 멤버들이 갑질을 하지 않고 얘기를 해주는 것에 대해 좋게 생각했다. 스타일리스트 일과는 자꾸 마음이 멀어져만 가는데, 멤버들과 헤어 메이크업 스텝들, 그리고 선배들과는 자꾸 마음이 가까워졌다. 그렇게 몇 달은 사람을 보고 일을 해 나갔다. 하지만 결국 그것도 끝이 있는 법. 나는 첫 음악방송 활동을 1주일 하고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해외 뮤비 스케줄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촬영 때마다 하나씩 일이 터졌고, 매일같이 야단맞는 것은 일상이었다. 팀장님은 중간에 열이 나고 아프셔서 실장님이 대신 현장을 가기도 했는데, 실장님이 왔다 하면 현장의 캐리어를 거의 다 헤집어 놓으시곤 했다.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촬영이 나를 점점 지치게 했다. 다행히도 넓은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사막만이 나를 좀 숨 트이게 해 주었다. 촬영이 아닌 휴식을 위해 다시 한번 찾고 싶은 곳이었다. 개인 촬영이 많아서 우리는 돌아가면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미국 옷 가게에서 원피스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받고 바로 한인택시를 타고 가게에 갔다. 그때는 로밍도 안 했는데 겁도 없이 잘 돌아다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가게는 오픈 전이었고, 타고 온 택시를 다시 타려던 나의 계획을 물거품이 되어가나 싶었다. 그때 택시 기사님이 나에게 할리우드를 가보았냐고, 안 가봤으면 지금 할리우드에 태워다 주고 오픈 시간에 맞춰 여길 다시 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나는 솔깃했다. 어차피 나는 이 택시가 없으면 미국에서 버려진 몸이었고, 기사님이 하자는 대로 했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혼자 할리우드 거리에 내려졌다. 낯선 곳이었고, 영화로만 보던 거리가 내 눈앞에 있었다. 말문이 막힐 정도로 신기했다. 그래, 내가 지금 할리우드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거, 맞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죄책감과 동시에 팀장님한테 걸리면 죽었다는 명쾌한 해답이 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뛰듯이 걸었다. 아니 걷듯이 뛰었다. 얼른 이 거리를 다 밟아 보고 다시 택시가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혹시나 택시가 나를 두고 어딘가로 갔을까 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에는 사인 시디를 파는 상인이 많았다. 나에게 친절한 미소로 공짜라고 쥐여주는 시디를 나는 일단 넙죽 받았다. 공짜니까. 그런데 계속 사인을 해주겠다며 뛰듯이 걷는 나를 성큼성큼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 순간 촉이 왔다. 이건 사인을 받으면 돈을 내야 하는 시디인 거야. 나는 따라오는 사람의 발밑에 시디를 내려두고 좀 더 빠르게 뛰었다. 정말 그 모든 게 나를 압박했고, 정말 무서웠다. 택시에 무사히 돌아온 나에게 기사님이 왜 이렇게 빨리 왔냐며 물었다. 지금의 나였다면 아마 눈치 따위 보지 않고 이것저것 즐겼을 것 같다. 심부름하다가 좀 샌 거 뭐 어쩌라고. 마지막 날까지 이런저런 일로 심하게 혼나고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다시는 뮤비 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건 한번의 경험만으로도 차고 넘친다고. 

이전 05화 자존감이 바닥나는 순간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