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DoG Oct 29. 2020

자존감이 바닥나는 순간들

어느 날부터 들려오는 컴백 소식에 나는 조금 힘이 났다. 컴백이면 앨범이 나오는 거고, 뮤비도 찍겠네? 나는 조금 신이 나서 행복했다. 하지만 스타일리스트 일은 행복할 수가 없나 보다. 의상 시안을 찾아야 하는데 나는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냥 주구장창 구글에 이미지 검색만 했다. 그렇게 몇 시간마다 한 번씩 팀장님이 컨펌을 봐주시는데, 나 말고 다른 선배들도 별 진전이 없었는지 팀장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오전 10시에 출근해서 반납 돌고 시안 찾기 시작했는데 시간은 이미 새벽 3~4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팀장님은 마우스를 집어던지며 소리를 쳤고 우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팀장님의 말을 들어야 했다. “이것밖에 못하냐” 라는 말이 오가고, 나는 “죄송합니다” 라는 말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이것밖에 못한다. 그걸 내가 ‘죄송합니다’로 인정하는 순간 내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냈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시안을 찾으려는데 팀장님의 호통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너무 반복되는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때문인지 지구가 돌아가는 느낌이 들면서 몸이 쓰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때 나는 그만두고 싶었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전에도 여러 번,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 ‘그만 둬야지’ 를 외치는 나지만 이번엔 확실하고 절실했다. 새벽 6시가 넘어가자 팀장님은 퇴근했다. “내일 아침까지 다 찾아놔” 라는 명언을 남기고. 우리는 아침 8시까지 시안을 찾다가 옷을 뒤집어쓰고 두 시간 쪽잠을 자고 일어나서 출근했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최악의 날이었고, 이후로 나는 시안을 찾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


시안은 몇 번이고 엎어져서 결국 처음 방향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덕분에 사입했던 백화점 브랜드 옷들을 전부 환불하는 아주 곤욕스러운 사태가 벌어졌다. 환불은 보통 뉴페이스가 한다. 한마디로, 내가 환불 담당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애를 환불을 보내야 그 막내가 욕도 다 먹고, 제일 불쌍해 보여서 일 것이다. 대부분 구입은 실장님이, 환불은 막내의 몫이다. 우리는 보통 사무실 근처의 갤러리아 압구정점에서 의상을 사입하곤 했는데 갈 때마다 생각하지만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백화점 안에 옷들은 최소 몇십만 원단위로 팔리고 있었다. 나는 몇만 원짜리 맨투맨에 세일해서 산 패딩을 입고 추워서 목도리까지 칭칭 감고 커다란 가방을 들고 그 명품 매장들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사야 할 브랜드 매장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보고 구입할 리스트를 체크한 후 구매한다. 카드는 물론 회사 카드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나를 보는 백화점 직원들의 눈빛은 싸늘하다. 딱 봐도 나를 업신여기는 눈빛이다. ‘쟤가 여길 왜 왔지?? 살 돈도 없으면서 냄새라도 맡겠다 이건가?’ 그러나 내가 리스트를 부르며 사이즈를 고르고 카드를 내밀 때 그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돈이라는 게 참 무섭다. 그렇게 명품으로 몇백만 원을 긁고 커다랗고 각진 쇼핑백을 내 어깨에 짊어지고 나오면서 나는 생각한다. ‘이건 내 목숨보다 소중해’ 


사실 가장 비참한 순간은 따로 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장 조사 할 때다. 말 그대로 현재 의류매장에 어떤 옷들이 나와있나~를 조사하는 일인데 이것은 사지도 않을 옷들을 다 하나하나 봐야 하고, 매장 직원 몰래 (혹은 양해를 구하고) 사진까지 찍어와야 하는 일이다. 사입은 나중에 내가 카드를 내미니까 그나마 뻔뻔하게 할 수 있지만 시장조사는 다르다. 내가 살 것도 아닌 물건을 보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비싼 매장에 갈수록 직원들의 눈초리가 따갑고 나는 놀라운 가격과 직원들의 차가움에 움츠러든다. 사진을 몰래 찍어 갈 때면 나는 제발 내가 이 옷을 사러 오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곤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내가 어깨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백화점 브랜드에서 값비싼 명품 의류들을 다 구입하고 나면 뮤비 촬영이 기다리고 있다. 뮤비 촬영이 조금 기대가 됐던 이유는 바로 해외 촬영이었기 때문이다. LA에서 뮤비 촬영을 한다니 힘들겠지만 괜히 설렘이 먼저 밀려왔다. 언제나 그랬든 설렘은 짧았다. 우리는 출국 전날까지 의상을 다 구입하지 못해서 출국 전날 새벽을 꼴딱 세웠다. 한 선배는 동대문으로 갔고, 한 선배는 근처 매장에서 픽업을 했다. 나랑 팀장님만 사무실에 남아서 이것저것 챙기고 있었다. 원래는 다같이 오면 짐을 싸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선배들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팀장님이 예민한 말투로 나에게 짐 안 싸고 뭐 하냐고 물었다. 나는 짐을 쌀 수는 있지만 어떤 걸 담아야 할지 정할 수는 없었다. 팀장님은 행거에 걸린 옷들을 바로바로 나누면서 챙길 것과 안 챙길 것들을 집어던졌다. 나는 캐리어를 열어서 일단 닥치는 대로 챙겼다. 


그 당시에 머리가 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 짐을 싼 사람은 나고, 옷이 없으면 내 책임일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일 시작할 때 일본에 실수로 빠트린 자켓 트라우마가 생각났다. 이번엔 무조건 많이 챙겨야지. 팀장님은 옷을 다 헤집어 놓고 담배를 피우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바로 짐을 챙겼다. 선배들이 돌아와서 내게 짐을 다 쌌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너가 짐을 쌌으니 너가 옷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며 옷 없으면 우린 다 죽었다고 속삭였다. 나는 그 말에 다 챙겼다고 대답했다. 팀장님은 자신이 챙기지 말라고 한 옷을 찾을 때가 종종 있었다. “내가 챙기라고 했는데 왜 안 챙겼어!!” 라며 화를 내는 경우가 다반수였는데, 어느 정도 겪어본 나와 선배들은 짐이 늘더라도 하나라도 더 챙겨서 가야 했다. 그렇게 새벽이 돼서야 짐을 다 챙길 수 있었고, 나는 새벽에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내 캐리어를 싸고 공항으로 바로 갔다. 나는 원래도 많이 우는 편이지만 매번 해외 스케줄 가기 전날에는 꼭 징크스처럼 울었다. 그날 역시 집에서 짐을 챙기다가 눈물이 났다. 나 정말 짐 다 챙긴 거 맞겠지... 안 챙겼으면 이번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랑 팀장님 단둘이 모든 짐을 챙겼기 때문에 팀장님이 원하는 옷을 내가 어느 캐리어에 넣었는지 기억해야만 했다. 

이전 04화 열아홉, 술로 시작하는 사회생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