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출국 전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펑펑 울었다. 책임감이 눈덩이처럼 불어서 나를 덥치는데 나는 이미 무릎을 꿇고 벌을 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선배들이 나를 위해 어제 밤새 정성스럽게 짐을 싸주어서 나는 걱정 없이 공항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저녁 비행기여서 아무래도 시간적으로도 조금 넉넉했다. 팀장님의 기분도 사뭇 좋아 보여서 나만 잘 하면 된다고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열한시를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미리 생각해 둔대로 캐리어를 정리했고, 팀장님은 기분이 좋으셔서 내가 하는 일에 크게 간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멤버 한 명이 스케쥴에 참석을 못 하게 돼서 남는 방 하나가 내 방이 되었고, 덕분에 팀장님은 커다란 트윈룸을 혼자 넓게 쓸수 있었다. 나는 조그마한 방에 의상 캐리어를 꾸역꾸역 넣어야 했지만, 팀장님과 떨어져 있을 수 있는 것 만으로 행복했다.
첫날밤 매니저님이 면세점에서 사온 술을 마시러 팀장님 방에 모였다. 일본에서 술을 거절한 후 엄청난 비난을 받은 이후로 나는 술자리에서 절대로 빼지 않았다. 물론 나서서 자리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부르면 꼭 나가는 사회인으로 물들었다. 한두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고, 그때 매니저님이 타주신 소맥은 내가 이때까지 마셔본 소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맛있었다. 내일 새벽같이 시작되는 디스패치 촬영은 나 혼자 가는 걸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먼저 내려와서 방에서 잠을 청했다. 딱 두시간 자고 벌떡 일어난 나는 바로 다리미를 꺼내 옷을 다리고 신발을 세팅해 놓았다. 새벽 네시 반이 되자 멤버들이 하나둘 내 방으로 왔고 팀장님이 이 옷 저 옷 주면서 입혀주었다. 나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양말과 벨트, 신발주걱 등을 챙겨주며 마저 못 다린 셔츠를 다렸다. 결국 나는 팀장님께 한소리 들었다. 미리미리 옷을 다려 놓지 않아서였다. 나는 최대한 노력했지만 그것마저 야단을 맞을 줄은 몰랐다. 팀장님은 아마 곧 다시 침대로 가서 못다 잔 잠을 자겠지만 나는 이제 곧 촬영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팀장님보다 최소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옷을 다리고 신발을 꺼내놓고 있었다. 억울했지만, 크게 혼나지는 않아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디스패치 촬영은 정말 별거 없었다. 특별히 봐줘야 할 것도 없었고, 얼굴과 상반신 위주의 촬영이라 그냥 옷 만져주는 척만 가끔 하면 되었다. 촬영이 끝나고 점심을 먹고 바로 케이콘 공연장으로 이동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일본에 온 이유였다. 대기실에 도착해보니 행거에 옷들이 다 걸려 있었고 기분이 썩 좋아 보이는 팀장님이 헤어 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캐리어를 혼자 끌고 오셔서 그걸 다 꺼내서 걸어놓으셨을 걸 생각하니 괜히 팀장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능숙하게 그 많은 착장을 순서대로 다림질했고, 신발까지 완벽하게 제 위치에 놔두어 세팅을 완료했다.
일본에 온 이후로 긴장을 놓아본 적이 없는 나는 팔과 다리 마디마디까지 힘을 주며 항상 팀장님의 기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일을 능숙하게 틀림없이 하면서도 팀장님의 기분을 맞추는 건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팀장님이 혼자 쓸쓸하게 있을 때는 아는 것도 공손하게 여쭤보면서 말을 걸어드리고, 밥 드실 때가 되면 눈치를 살피며 밥 생각 있으신지를 물었다. 레드 카펫 착장을 다 입히고 (다행히 멤버들이 나 혼자 온 것을 알고는 옷을 주면 알아서 입어주었다. 우스갯소리로 “정현이 이제 혼자도 다 오네~” 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말이다) 멤버들이 공연장으로 내려가자 팀장님이 팔을 걷어붙이곤 내려가셨다. 팀장님의 현장가방을 챙겨드리고 나는 대기실에서 다음 착장을 신발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나는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히는 역할이었고, 팀장님은 아래에서 무대 올라가기 전에 옷 매무새를 만져주시기로 했다. 내가 하나라도 잘못 입히면 큰일 나는 상황이었기에 더욱더 긴장을 했고, 안 그래도 땀이 많은 나는 연신 휴지로 내 손을 닦았고 발은 이미 신발 안에서 썩어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 멤버들이 또 올라와서 한꺼번에 옷을 갈아입는다는 사실이었다.
“정현아~ 나 옷 줘~ 나 신발주걱 줘~ 나 이거 어디에 둬?” 와 같은 수많은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지만 내가 집중해야 할 질문은 딱 하나다. “정현아 나 뭐 입어야 돼?” 다음 옷을 정확하게 주는 게 제일 중요했고,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발주걱은 옆에 있는 매니저도 도와줄 수 있는 일이고, 입었던 옷을 그냥 아무 데나 둬도 내가 나중에 한꺼번에 챙기면 되는 일이었다. 멤버들이 착해서 다행이지 하나하나 다 챙겨줘야 하는 왕자님 같은 사람들이었으면 아마 나는 미쳐버렸을 것이다. 무사히 두 번째 착장, 그리고 세 번째 착장까지 잘 입혀 내려보냈고, 나는 이제 짐 정리를 빠르게 시작했다.
선배들이 했던 그대로 짐을 챙기는데, 선배들은 항상 캐리어에 넣기 전에 옷의 갯수를 샜다. 워낙에 멤버 수가 많고, 옷이 많다 보니 하나가 빠져도 모르고 안 챙기는 수가 생겨서 우리 팀은 항상 개수에 예민했다. 또한 구둣주걱이나 깔창, 양말 등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에 정리를 해야 했고, 신발은 두 짝씩 비닐 폴리백에 넣어 차곡차곡 캐리어를 싸야 했다. 또한 캐리어의 무게 분산을 위해 캐리어 반쪽에는 신발, 반쪽에는 옷을 넣는데, 어디에 어느 옷이 있는지 바로 알아볼 수 있도록 캐리어 위에 종이테이프로 마킹을 꼭 해놓는다. 나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름을 느끼고 정리에 속도를 높였다. 어차피 멤버들은 이제 콘서트 끝까지 그 의상으로 가고, 나중에 호텔에 와서야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기 때문에 나와 팀장님은 짐을 다 챙겼는지 마지막 확인을 한 후에 바로 호텔로 출발했다. 캐리어는 차에 실었지만 우리는 자리가 없어서 호텔까지 걸어가야 했다. 다행히 호텔과 공연장의 거리가 매우 가까운 편이라 지친 다리를 이끌고 걸었다. 팀장님은 매우 힘드셨는지 가는 길에 계속 “힘들다... 넌 안 힘들어?” 라고 물어보았다. 처음으로 따뜻한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아서 내심 기분이 좋았다. 팀장님의 기분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한시름 놓았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어던지고 양말을 벗었다. 하루 동안 신발 안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양말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다. 화장실 구석에 얼른 밀어 넣고 발을 씻으려던 찰나, 어느새 끝났는지 멤버들이 옷을 갈아입으러 내방으로 왔다. ‘아, 나는 아직 일이 안 끝났네?’ 라고 생각하는 동안 멤버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현아 방에서 이상한 냄새 나는데?? 하수구 썩은 것 같아” 라며 화장실 주변에서 냄새가 난다고 호텔에 얘기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다들 한마디씩 했다. 나는 혹시나 내 발 냄새인 걸 들킬까 봐 최대한 멤버들에게 멀리 떨어져서 옷을 주었다. 그렇게 한바탕 멤버들이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고 나서야 발을 깨끗이 씻고 양말을 처리할 수 있었다.
술과 담배 안 하고 무슨 재미로 사냐고 나한테 한소리 하는 팀장님은 오늘도 자신의 방에서 술 파티를 벌였다. 나는 당연히 웃으면서 술을 마셨고,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기에 오늘처럼 새벽같이 일어나야 한다는 이유로 조금 일찍 방에 들어와 쉴 수 있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콘서트가 끝났지만 나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일을 해야 했고, 너무 바빠서 집에 가지도 못한 채 사무실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이틀째 집에 못 들어가고, 일본에서 온 짐 그대로 불쌍하게 지내니까 팀장님이 나를 먼저 퇴근 시켜 주었다. 당장 내일이 컴백이었지만 집에 갈수 있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