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oDoG Oct 29. 2020

아이돌과 음악방송

아이돌은 음원을 발표하는 날, 혹은 그 주에 쇼케이스를 하고 본격적인 음악방송을 시작한다. 한마디로 쇼케이스는 가장 중요한 첫 단추이다. 일단 첫 번째 주 의상은 대부분 뮤비에서 착용한 의상을 그대로 썼다. 옷은 문제가 없었지만, 일주일간은 수록곡을 함께 하기 때문에 새로운 착장이 필요했다. 다행히 컨셉에 큰 무리가 없어서 단체복으로 준비했고, 일주일간의 음악방송이 시작되었다. 음악방송 첫날 나는 지각을 했다. 한 시간 정도 늦게 대기실에 도착했고, 팀장님과 선배들은 이미 와서 옷을 정리하고 있었다. 너무 졸리고 힘들었지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팀장님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렸고, 선배들에게도 죄송하다고 연신 말을 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사전 녹화와 생방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사전녹화는 새벽같이 시작되기 때문에 보통 우리는 새벽 4시에 매니저 차를 타고 대기실로 이동한다. 그렇게 아침 6시까지 의상 입고 헤어와 메이크업 수정을 본 후, 드라이리허설과 사전녹화를 하러 들어가고, 스텝들은 모두 모니터 앞에 서서 각자 맡은 부분을 화면으로 점검하고, 나 같은 막내들은 그 화면을 고스란히 핸드폰으로 녹화해서 실장님께 전달을 해드렸다. 사전 녹화에는 팬분들도 많이 오셨는데, 정말 이 차디찬 아침에 여길 오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만큼 열정이 있어서 온 것일 텐데, 나는 이 일에 그만큼의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느끼며 새삼 어떤 일에 열정이 넘치는 그들과, 그 사랑을 독차지하는 멤버들이 부러웠다. 사전녹화가 끝나면 아침을 먹고 매니저님들이 돗자리를 펼쳐주면 불을 끄고 잠자는 시간이 온다. 그 시간에는 스텝들도 구석에 쭈그려서 잠을 자거나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우리처럼 다음 음악방송 옷을 구하러 가야 한다면 우린 그 시간에 옷을 구하고 다녔다. 


사전녹화 때는 팀장님과 나, 그리고 선배 한 명이 있다가, 사전녹화가 끝나면 팀장님은 사무실에 출근한 다른 선배와 다음 착장을 준비하러 가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현장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있어야 했다. 그렇게 잠을 자는 시간은 오후 2시~3시쯤이면 끝이 나고, 다시 일어난 멤버들에게 밥을 먹을 시간이 온다. 보통 소속사 직원들은 스텝들의 밥을 잘 챙기지 않기 때문에 멤버들이 다 먹었는지 확인을 한 후 스텝들은 알아서 가져다 먹는 식이었다. 마치 남은 밥을 주워 먹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차례대로 옷을 갈아입고 헤어 메이크업을 한 후에 생방 무대에 선다. 생방은 대기실에서 모니터로만 볼 수 있어서, 딱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생방이 끝나면 그다음 스케줄로 이동하는데, 대부분 라디오나 팬사인회가 기다리고 있다. 가끔 잠을 자는 시간에 라디오나 촬영이 끼어 있기도 하며, 하루 종일 풀 스케줄인 날도 있었다. 


라디오나 팬미팅을 진행하게 되면 관건은 그거다. 방송할 때 의상을 입고 하는지, 아니면 개인 사복을 입고 하는지. 의상을 입고 하는 스케줄에는 무조건 내가 따라갔다. 하는 일이라고는 스케줄이 끝나면 멤버들 개인 사복을 주고, 의상을 받아서 오는 일이었다. 가장 소수의 스텝들로만 구성해서 팬사인회를 가게 되고, 나는 피곤하지만 긴장이 풀린 채로 팬사인회 대기실에서 뻗어 있으면 된다. 이렇게 일주일이 반복이 되는 게 음악방송이다 보니 우리는 새벽에 퇴근하고 새벽에 출근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잠자려고 씻고 나왔더니 매니저님 차가 도착해서 얼른 나오라고 하질 않나... 말이 안 되는 스케줄을 말이 되게 해야 하는 게 스타일리스트의 능력인 것 같다. 


내가 거의 모든 스케줄에 현장으로 나가다 보니 팀장님보다도 자주 보게 되는 게 바로 매니저였다. 아이돌 팀에는 매니저님이 두 분 이상 계셨는데, 항상 오시는 한 분이랑 친했다. 처음 봤을 때는 깡패같이 덩치도 크고 험악하게 생겨서 좀 무섭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내가 귀여웠는지 틈만 나면 나를 놀리는 게 취미인 분이었다. 하지만 나도 질세라 받아쳤고, 맨날 투닥투닥 거리면서 편한 사이가 되었다. 멤버들이 매니저님과 나의 케미를 보고 재밌다고 할 정도였고, 아마 내가 매니저님 마음에 꽤나 들었던 모양인지 매니저님도 내 부탁은 잘 들어주었다. 시간이 갈수록 일보다는 사람한테 정이 붙어서 못 그만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니저님은 오래 본 다른 선배들보다도 나를 더 예뻐해 주었고, 우리가 맨날 타고 다니는 벤 기사님도 오래 일한다며 나를 특별히 예뻐해 주었다. 나도 안다. 내가 남자라서 어느 정도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걸. 하지만 나는 일본 케이콘을 다녀온 후로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부장님께 말을 해 놓았고, 그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팀장님은 물론, 선배들한테도 말을 안 하고, 나만 그만두는 날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말을 해야지 싶다가도, 괜히 일찍 말했다가 서먹해질까 봐 그만두기 전날에나 말을 해야지 싶었다. 


그날도 특별한 거 없이 음악방송을 끝내고 나 혼자 팬사인회에 와서 대기실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고 매니저님과 떠들고 있었다. 갑자기 매니저님이 장난 식으로 “넌 언제 그만두냐?” 라고 물었고, 어차피 매니저님께는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저 내일모레까지만 해요. 말하지 마세요” 라고 말했다. 매니저님은 대박을 낚았다는 듯이 그 순간 바로 헤어 메이크업 스텝들한테 가서 내가 그만두는 사실을 전했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그만두는 걸 알게 되었고, 결국 팀장님 귀에까지 소식이 들어갔다. 팀장님은 내가 자기한테 말하지 않고 바로 부장님께 말씀을 드린 게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내게 말을 했다. 부장님도 그 말에 동의하며 당연히 팀장님과 얘기가 된 사실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 후로 나는 팀장님과 조금 긴 면담을 했다. 이제는 너무 지치고 긴장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팀장님의 눈도 못 마주친 체 얘기를 했고, 팀장님은 살짝 붙잡는듯했지만 그때의 나는 무조건 도망쳐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그만두겠다고 단칼에 못을 박았다. 

이전 08화 65벌의 옷을 책임지고 떠나는 케이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