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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19. 2020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백수가 되다

휴직,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세상의 어떤 일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온다. 내가 백수가 된 일도 그랬다.


사회생활 6년 차, 나는 어느새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크게 특별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의 담당 의사 선생님은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경도 우울증 정도는 매우 흔한 질환이라고 하셨고, 우울증 상담 내용을 책으로 엮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야흐로 우울증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위치한 정신건강의학과는 대기 좌석에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늘 붐비기도 했다.


하지만 20년을 함께한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넌 게 충격이 컸던 탓일까. 또는 사랑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아서일까. 그도 아니면 업무량이 과중하고 미래에 대한 고민이 너무 컸던 탓일까. 나는 정신 건강이 무너짐과 동시에 신체의 컨디션 또한 급격히 악화되면서 정상적인 회사 생활이 힘들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심 기뻤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드디어 최적의 퇴사 타이밍이 왔다고 생각했다. 사실 퇴사가 너무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명분도, 용기도 없던 차에 좋은 구실 하나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건강을 잃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반박하기 어려운 절대 명분 아니던가.


곧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퇴사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들은 내게 우선 휴직을 할 것을 권유하며, 퇴사는 휴직기간이 끝난 이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여러 날 고민했지만 굳이 계속 퇴사를 고집할 만한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고, 그렇게 조용히 의사 소견서를 바탕으로 회사에 7개월간의 휴직계를 냈다.


우선 회복에만 집중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 때 뵈어요


좋은 사람들이 가득한 회사였고, 휴직 처리는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조용히 정든 회사에 작별 인사를 건넸다. 복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내겐 사실상의 퇴사였다.



© Free-Photos, 출처 Pixabay


아침에 출근카드 찍을 때마다 정말.....
나도 하고 싶은 게 있었던 거 같은데...
없었나.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2화에서 경영대 졸업 후 뒤늦게 꿈을 찾고자 음대에 진학한 주인공을 보고 공무원 친구가 하는 말이다. 동창회 장면에서 ‘친구 6’ 정도 역할의 흘러가는 대사였을 뿐인데, 내겐 이 말이 그 어떤 대사보다 마음에 와 박혔다.


나도 늘 그랬기 때문이다. 오늘 당장 쳐내야 하는 일에 집중하느라 좋아하고 잘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그런 하루가 매일 쌓이다 보니 내가 뭘 좋아하고 잘했는지,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하긴 했는지 어느 순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한 달에 한번 달콤한 월급을 맛볼 수 있는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매일 이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자주 아득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찾아보겠다고 미약하게나마 꿈틀댔을 즈음,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그렇게 휴직의 기회를 만났다. 허지웅 작가가 어느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 운명 이야기가 아니다. 충분한 원인과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나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내일이 별로 기대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긴 했지만, 인생에서 한 번은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도전하고 시험해보고 싶은 열망이, 나도 모르는 새 자리 잡은 그런 마음들이 결국은 조금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에게 멈추어갈 기회를 주었다고 믿는다.


어쨌든 한 번은 멈추어가야 할 때였다. 자동차들도 대개 10,000km를 달릴 때마다 점검을 받고 낡은 부품을 새 것으로 교체한다. 하물며 자동차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민한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이 계속 달리기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가끔은 멈춰서 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지, 어디 탈이 난 곳은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재수생이었던 적도, 취준생이었던 적도 없이 입사 후 5년을 쭉 달리기만 했던 내가 백수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게 내 인생 처음으로 돈은 없고 시간은 남아도는 백수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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