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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9. 2020

죽고 싶지만 안전벨트는 매고 싶어

어쩌면 '죽고 싶다'는 말은 '지금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뜻일지도


차바퀴에서 묵직한 쇳덩이가 요란하게 긁히는 소리가 났다. 지난 겨울, 동생과 함께 차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위에서였다. 타이어 공기압 경고등이 들어왔을 때, 그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차 뒷바퀴가 터진 것 같았다. 나는 일단 차선을 가장 바깥쪽으로 변경했다.


"이러다... 골로 가는 거 아니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사람이 진짜 놀라면 호들갑도 떨지 못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세상 그 어떤 때보다 침착하게 '갓길, 갓길'만 외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뒷바퀴가 빠져나와 저만치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고, 내 차가 고속도로 위에서 빙그르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그 뒤로 연쇄 추돌사고가 발생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시뮬레이션되었다.


한참을 달렸는데도 갓길은 나오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사는 게 권태롭고 피곤해서 '죽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그 순간만큼은 왜 그렇게 갓길이 절실했는지 모르겠다. 타이어의 쇳소리는 우리의 귀를 날카롭게 파고들며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그, 그동안 고마웠다."


거의 울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동생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을 때, 저 앞쪽 길가에 차 한 대 정도 주차할 수 있을만한 협소한 공간이 보였다. 종교도 없는 주제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말 그대로 god 길에 겨우 차를 세웠다. 바로 비상등을 켜고 밖으로 나와 트렁크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비상사태임을 표시해두었다.


그리고 바로 뒷바퀴를 살펴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동차 뒷바퀴는 형편없이 찢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조금 스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달렸다니 바퀴가 튼튼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둔감한 것인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보험사에서는 우리의 위치를 확인한 후 곧 견인차를 보내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겨울밤, 우리는 옆 도로에서 달리는 자동차의 엄청난 속력을 고스란히 느끼며 위험한 갓길에 서 있었다. 위아래 치아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몸을 떨었던 것은 그 날 따라 날씨가 너무 추워서였는지, 결국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조금은 쓸쓸하고도 웃긴 풍경이었다.


20여 분쯤 뒤, 견인차가 도착했고 기사님은 빠른 속도로 바퀴를 교체해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난생처음으로 견인차에 탑승해보았다. 견인차는 영화에서 본 것처럼 운전석, 운전석 옆 가운데 조그만 좌석, 그리고 조수석이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내가 가운데 앉았고 동생이 조수석에 앉았는데 웬일인지 안전벨트가 하나밖에 없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망설임 없이 내 몸통에 잽싸게 안전벨트를 둘렀다. 나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우리는 몇 초간 서로의 얼굴을 멀뚱하게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서점의 에세이 코너에 가면 깜짝 놀란다. 책 표지에는 온통 누워있는 사람 일러스트가 가득하고, 책 제목은 하나 같이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네 삶이 고단하다는 뜻 같아서 나는 늘 조금 서글퍼진다. 한 때 죽음에 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당장 죽음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자살 사고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별로 내일이 기대되지 않는 삶이라서 죽음이 당장 찾아와도 아쉬울 것 없다는 마음이었다. 그즈음 버릇처럼 '죽고 싶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자동차 바퀴가 터진 날, 하나밖에 없는 안전벨트를 차지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정말 죽고 싶다기보다는, 계속 이대로 살고 싶지 않은 것이었음을, 나의 '죽고 싶다'는 말의 속뜻은 지금처럼 말고, 정말 잘 살아보고 싶다는 뜻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고, 밖에 나갈 때는 마스크로 코와 입을 꼼꼼히 가리고, 여름 철에는 질식해 죽지 않도록 선풍기 예약 타이머를 굳이 맞추어 놓고 잠드는 것이 아닐까.


지금도 여전히 나의 세로토닌의 수도꼭지는 살짝 고장 나있다. 남들보다 수도꼭지가 꽉 잠겨있어서 쉽게 우울감에 젖어 있고는 한다. 하지만 이건 나의 뇌의 문제일 뿐, 나라는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갑자기 세로토닌의 수도꼭지가 활짝 열려서 행복감이 콸콸콸 쏟아지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는 동안 내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누리면서 잘 살아보고 싶은 욕심은 있다. 그래서 요즘은 '죽고 싶다'라는 말이 버릇처럼 튀어나오려고 할 때마다, 스스로 이렇게 바꿔 말한다.



살고 싶다. 더 잘 살아 보고 싶다.



실은, 나는 누구보다 삶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람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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