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이 아닙니다
나이 70이 되어 돈이 부족해서
생활하기 불편해지면,
그때는 지금 쉰 시간을 절실하게
후회하게 될 거예요.
브런치에 백수 생활에 대한 첫 글을 발행했을 때, 어르신들이 내게 남겨주신 댓글이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가난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깨닫는 날이 올 것이다.' 등의 저주인지 악담 비슷한 조언을 남겨주셨다. 물론 오래 살아보신 분들의 말씀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되겠지만, 나는 이때 백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얼마나 좋지 않은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맞다. '먹고사니즘'은 인류가 당면한 최대 과제이며 그 자체로 너무나 위대하다. 나는 가끔 아침 일찍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일종의 숭고함마저 느낀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자리로 향하며,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군가가 볼 때는 한창 젊은 나이에 이 숭고한 행위를 마다하고, 가만히 멈춰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태만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게다가 모든 것이 기약 없고 불안한 코로나 시국에 백수가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비현실적이고 배부른 소리다.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행복을 운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살면서 아무리 생업에 치이더라도 꼭 한 번쯤은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꼭 퇴사를 하라거나 백수가 되라는 소리가 아니다. 적어도 나라는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 알고 달려야 제대로, 건강하게 달릴 수 있지 않겠는가. 맞지 않는 러닝화를 신고 달리다가는 얼마 가지 못해 주저앉아버릴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동생과 나는 남들이 말하는 소위 '백수'의 시간을 겪었다. 3년 전 동생이 가족들의 온갖 구박을 받으며 백수 시기를 보낼 때 나는 동생의 손에 용돈을 쥐어주면서 동생의 미래를 응원했고, 동생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언니를 위해 생활비를 더 많이 내고, 가끔 비싼 밥도 사주면서 나를 지지해 주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서로의 시간을 응원하는 이유는 이 시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멈추어가는 시간을 겪어본 사람들로서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이 시간을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돈벌이를 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통틀어 편의적으로 '백수'라고 부르고는 한다. 하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백수'의 사전적 정의는 '돈 한 푼 없이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건달'이다.
백수가 되는 데 이렇게 많은 자격요건이 필요한 줄 미처 몰랐다. 돈도 한 푼 없어야 하고, 빈둥거려야 하며, 놀고먹어야 하고, 심지어 건달이어야 한다니! '건달'의 사전적 정의는 더욱 놀랍고 심각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난봉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더 슬퍼지지 않으려면 여기서 언급을 멈추도록 하겠다. 어쨌든 지금 이 사회가 돈벌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지 '백수'라는 단어에서조차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는 절대 놀고먹으면서 빈둥거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게다가 난봉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건달은 더더욱 아니었다. 살면서 그 어떤 때보다 치열하게 몸과 마음을 다독였고, 나를 알기 위해 노력했다. 지난 십 년 동안 내적으로 성숙한 것보다, 최근 일 년간 내적으로 훨씬 많이 성숙했다.
그러니 부정적인 의미의 백수와는 별개로, 잠시 멈추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이 시기를 새롭게 이름 붙여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기 관찰의 시기' 정도면 어떨까 한다. 기발하고 깜찍한 명칭이 떠오르길 기대했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명칭은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소 심리학적인 용어 같긴 하지만, 뭐가 어찌 됐든 빈둥거리며 놀고먹는 백수건달보다는 나은 것 같다.
돈 벌어서 생계를 유지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대비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고 삶의 방향성을 점검하는 일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니 누군가 당신을 향해 백수라고 비아냥 거린다면 당당하게 윙크하며 ‘쉿, 자기 관찰 중!’이라고 말하자. 그리고 더욱 굳건하게 뚜벅뚜벅 나만의 길을 걸어 나가자. 적어도 여기 두 자매는 당신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 커버 출처 : https://www.google.com/amp/s/m.insight.co.kr/amp/news/261067
안녕하세요 모범피입니다.
밀리의 서재에서 <백수가 된 모범생의 각성기> 포함 브런치북 전자책 출판 프로젝트 수상작 20편이 공개되었습니다.
밀리의 서재 오리지널 <백수가 된 모범생의 각성기> 에서는 브런치 최종 수정 원고 및 추가 원고, 그리고 귀여운 일러스트까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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