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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1. 2023

이다지도 불편한 널 데리고 산다는 건

아날로그의 손맛, 바이닐 디제잉


집에서 일을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을 땐 의자를 힘주어 뒤로 밀며 미련 없이 책상을 떠난다. 멀리 가지는 못하고 바로 뒤를 돌아 바이닐이 꽂혀 있는 장으로 가서 트라이벌 하우스 판을 하나 골라 턴테이블에 올린다. 아, 그전에 혹시 레코드판이나 바늘에 먼지가 붙지는 않았는지 세심하게 살펴줘야 한다. 안 그러면 소리가 나지 않거나 듣기 싫은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뒤 턴테이블의 START 버튼을 누르고 판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 마치 소중한 사람에게 차를 따르듯 섬세하게 톤암의 바늘을 판 위에 올린다.


"칙 치직.."


누군가는 비 내리는 소리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모닥불 타는 소리라고도 하는 노이즈가 들리고 나면 비로소 음악이 시작된다. 나는 바이닐 위에 미세하게 각인되어 있는 나이테 같은 줄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만의 세계로 떠난다. 마치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아무 생각이 없어지듯, 언젠가부터 이게 나만의 명상 비법이 됐다.


몇 년 전부터 바이닐 디제잉이 국내에 빠른 속도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 같다. 일부 클럽에는 디제이 덱(deck)에 CDJ나 세라토 같은 디지털 장비가 아예 사라지고 턴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여있기도 하다. 10년 전만 해도 DJ 소울스케이프 같이 바이닐백을 들고 다니는 DJ의 모습은 흔치 않은 광경이었는데, 이제 클럽에서 USB가 아닌 바이닐 백을 이고 지고 다니는 DJ들의 모습은 정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길래? 편리한 디지털 장비를 두고 굳이? 그리하여 나는 결국 바이닐 디제잉을 배우기에 이른다. 우리 MZ세대들에게 (굳이 따지자면 나는 밀레니얼 세대다) LP와 턴테이블은 사실 거리가 엄청 먼 것들이다. 내겐 MP3나 CD 플레이어가 오히려 더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닐 디제잉을 배우고자 한 것은 허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다른 심오한 뜻은 없었고 그냥 멋있어 보여서였다. 무선 이어폰 대신 굳이 줄 이어폰을 쓰고, 아이폰 대신 굳이 아이팟을 쓰고 싶은 그런 감성이랄까.


현재 을지로의 미오레코드가 이전하기 전 세운상가에 있을 때 디제잉용 턴테이블을 집에 들였다. DJ들이 제일 많이 쓴다는 일본 Technics사의 SL-1200 MK5 모델이었다. 턴테이블과 변압기까지 무게가 엄청난 것들을 한 겨울에 친구와 함께 낑낑대며 옮기느라 엄청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디지털 장비와 아날로그 장비까지 집에 갖추고 보니 아주 그럴싸했다. 괜히 어깨가 으쓱, 이제 나도 멋지게 디제잉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괜히 '아날로그'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비트매칭의 늪에 빠졌다. 디지털 장비를 가지고도 비트매칭의 지옥에서 헤맸는데, 여러 가지로 몇 배 더 불편한 아날로그 장비에서 내가 헤매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자 못난 마음들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며 바이닐 디제잉에 대한 온갖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방 안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디깅 할 수 있는 시대에 레코드 샵에 꼭 가야 하나?'


'USB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되는데 무겁게 바이닐 백을 꼭 들고 다녀야 하나?'


'디지털 트랙은 큐 포인트(Cue Point : 믹스를 시작하는 지점)를 레코드 박스(Rekord Box: 디제이용 소프트웨어)로 찍으면 되는데, 바이닐은 머리로 다 기억하거나 레코드 판 위에 스티커 붙여야 되잖아. 그 짓을 꼭 해야 하나?'


'바이닐은 온도에 취약해서 관리도 잘해줘야 되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는데 이걸 계속 모아야 하나?'


‘기술이 발전했는데 꼭 시대를 역행해야 하나?’



따지고 보면 바이닐 디제잉은 불합리함의 끝이었다. 합리적인 것을 따진다면 당장 그만두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지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아날로그의 ‘손맛’이었다. 물성이 주는 힘은 실로 대단했다. 내가 틀 음악을 레코드샵에 가서 직접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손에 쥐고 감각하는 경험 자체가 이전에는 아예 없던 것이었다. 나는 네모난 판들의 아트워크와 간단하게 붙어있는 정보들을 구경하며 바이닐을 휙휙 넘기는 행위 자체에서 나름 힐링의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몇 장을 골라 들고 레코드 샵에 있는 턴테이블을 이용해 바이닐의 A side, B side를 바쁘게 뒤집어가며 청음을 해보는 과정에서도 손을 날래게 쓰는 매력을 느꼈다. 스마트폰 탭이나 PC 클릭 몇 번으로 음원을 미리 듣기 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고로움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디지털 음원으로는 전혀 구할 수 없는 판을 발견하거나, 온라인에서 비싸게 팔리고 있는 중고 판을 헐값에 살 수 있는 행운을 종종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발굴한 레코드판을 구매해서 직접 두 손에 쥐고 집에 돌아갈 때는, 뭐랄까, 디깅의 손맛과 참맛을 동시에 느꼈다.


디깅 할 때뿐만 아니라 디제잉을 할 때도 그렇다. 아직 바이닐 디제잉에 완전히 익숙한 건 아니지만, 바이닐 디제잉을 하다가 디지털 장비로 넘어가면 뭔가 허전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주변의 바이닐 디제이들에게 물어봐도 그렇다. 어두운 조명 아래 바이닐 백에서 적당한 판을 찾아 꺼내고, 턴테이블 위에 판을 올리고, 큐포인트를 잡고, 비트매칭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사라지면 너무 심심하다고 한다. 집에 바이닐을 보관하는데 공간도 많이 차지하고, 공연 때마다 바이닐 백을 이고 지고 다니기 여간 힘든 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바이닐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 바이닐 디제잉의 ‘손맛’에 익숙해진 것이다. 이 편리한 전자책의 시대에 종이책을 직접 한 장 한 장 넘겨 가면서 읽고,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오면 펜을 사용해서 밑줄도 긋고, 책 한쪽 귀퉁이를 여전히 접어두는 사람이 있듯이, 아날로그의 손맛은 이토록이나 중독적이다.


((그렇다면 바이닐 디제이들이 디지털 디제이들보다 실력적으로 월등한 사람들인가? 나는 무관하다고 본다. 음악을 들려주는 도구와 수단의 차이일 뿐 어떤 음악을 어떻게 들려주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전자책과 종이책이 공존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훌륭한 콘텐츠를 최우선으로 여길 뿐, 콘텐츠를 소비하는 수단은 편리와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나는 어떤 장비를 사용하든 좋은 음악을 들려주는 디제이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요리도 젬병인 내가 손을 쓰는 일이라곤 스마트폰에서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놀리거나 키보드 타이핑을 하는 일 또는 헬스장에 가서 덤벨을 잡는 일뿐이다. 그런 내게 바이닐을 다루는 것은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섬세한 작업 중 하나다. 새삼 내가 아끼는 트랙들을 손에 쥐고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번 주말에는 나의 무심함으로 혹시 방치해 둔 바이닐들은 없는지 한번 살펴보고 먼지가 쌓인 트랙들이 있으면 세심하게 닦아 주어야겠다. 또 친구의 생일을 맞아 아트워크가 희귀한 바이닐을 디깅 하러 레코드샵에 오랜만에 방문하려고 한다. 소중한 사람에게 직접 선물을 건넬 수 있다는 것도 아날로그의 중요한 ‘손맛’중 하나인 것 같다.





* 커버 이미지: Unsplash의 Jonas Leu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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