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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르베 Apr 30. 2021

엄마는 오늘도 그림책

어쩌다 빠진 그림책

돌아보니 난 은근히 하나에 빠지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GO!’ 하는 스타일이다. 결혼도 그랬다. 등 떠밀려 나간 선자리에서 슬로우 모션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에게 반해 두 번째 만나는 날, 당신과 결혼할 거라 선포했으니 그 말에 좋다고 대답한 그 남자가 지금의 남편이다. 그때 나의 연애하는 모습을 본 친정아빠는 내가 증발했다는 말을 하셨으니 내가 무언가에 빠지면 그렇게 보이나보다.


이번에는 그림책이다.

봐도 봐도 좋으니 남편에게 나중에 우리 나이 들면 커피에 진지한 당신은 커피 할아버지하고 난 그림책 할머니 하자며 농을 던진다.


처음에는 그림책 속 간단해 보이는 글과 그림으로 아이에게 뭘 질문하고 뭘 이야기할지 몰라 어려웠는데 이제는 즐기는 요령, 다루는 요령이 생겨 그림책과 함께 하는 일상에 몇 가지 변화들이 생겼다.


그림책 선물하는 취미가 생겼다.

조카가 올해 예체능 입시 준비를 한다. 자주 만나지 못하기에 어쩌다 한번 만나 소식을 들어보면 나의 지난 입시가 생각난다. 오랜 입시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하고 점수에 연연했던 시기. 점수에 예민해질 시기에 나다움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슈퍼거북>,<슈퍼토끼>를 선물했다.


몇 년 전 결혼한 지인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아직 아이 계획이 없어 부부 둘 만의 이야기가 많은 일상에 의미 있는 선물을 하나 주고 싶어 고민하다 <친구에게>라는 그림책을 하나 골랐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함께 살아보니 부부라는 건 함께 즐기고, 함께 계획을 하고, 힘듦을 함께 견디며 서로를 살펴주는 사이라는 사실이 매년 실감이 난다. 이 그림책에서 말하는 친구가 나에게는 남편 같았다. 아이들에게 친구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어 골랐는데 읽다 보니 부모가 아이에게, 부부가 서로에게 읽어주어도 좋을 것 같은 그림책이었다.


아이의 행동에 대처할 요령을 배워간다.

아이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화가 난 날이었다.

"엄마를 화산에 넣고 싶을 만큼 화가 나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하는지, 어떻게 엄마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는지 따지고 싶었는데 고민만 하다가 어물쩍 지나갔다.

<WHERE THE WILD THINGS ARE> 우리나라에서 <괴물이 사는 나라> 알려진 그림책이다. 그림책 속에는 짓궂은 장난을 일삼고, 엄마를 잡아먹겠다는 아이가 나온다. 1963  그림책이 출간되자 아동과 관련된 학문, 출판 등에서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림책 속에 나오는 아이의 말과 행동이 사나워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아이들은 이렇게 사납지 않다는 이유, 혹은 다른 순진한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고 따라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림책 분야에서 스테디셀러인 이유는 그런 사나운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당연한 아이의 모습이라는 공감 때문이었다. ‘맞아! 우리  아이도 저래.’ 하는 공감. 그림책을 읽고 나니 아이의 행동과 말에 조금은 느긋해질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까 아이지' 하면서.


이후, 아이가 집을 나가서 혼자 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말을 듣고 <괴물이 사는 아이>를 떠올렸다. 이제 논리를 따지지 않고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어디로 갈 건데?"

"우주로 갈 거예요."

"뭐 타고 갈 건데?"

"우주선을 만들어야지요."

"뭐로 만들건대?"

"나무랑 쇠가 필요해요."

"엔진도 필요하지 않아?"

"맞아요."

"화장실도 있어야 할 텐데."

"그래서 집 화장실에 호스를 연결해서 우주선에 연결할 거예요."

이런 대화가 오고 가는 동안 엄마를 화산에 넣고 싶다던 아이의 얼굴에는 화난 마음 대신 그럴싸한 대답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웃는 짓궂은 얼굴이 나타난다. 그렇게 한 고비를 또 넘긴다.


그림책 덕분에 뜻밖의 재능이 생겼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숨은 연기력이 그림책을 읽는 동안 빛(?)이 나고 있다. <엄마의 딱풀>은 엄마에게 대항하는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그림책이다. 엄마의 잔소리를 막을 방법으로 딱풀을 립스틱이라 건넸는데 딱풀을 바른 엄마의 입이 붙어버린다는 이야기다. 그 모습이 아이에게는 내심 좋은 가보다. 읽은 책을 읽고 또 읽어달라고 가져오고 매번 소리 내며 웃으니 말이다. '설마 엄마 입을 딱풀로 붙이고 싶은 거 아니야?' 하고 장난스레 노려보면 아이들은 그 말마저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그 마음에 장단 맞춰주고자 그 시간만큼은 입이 붙어 말 못 하는 엄마의 연기를 선보이고 그런 날 보고 아이들은 재미있다고 웃는다.


액션배우가 되어야 할 때도 있다.

<엄마가 달려갈게>는 네 옆에 항상 엄마가 있다는 메시지를 갖가지 상황을 들어주며 알려주는 이야기다. 우리 집의 하이라이트는 무서운 적들이 나타나는 장면이다.

<엄마가 달려갈게>를 읽는 날 나는 이소룡이고, 쿵후 판다가 된다. 몸치인 엄마지만 이 장면에서 '아뵤!'도 실감 나게, 동작 하나하나 절도 있게 해줘야 한다. 식구들도 잘 모르는 나의 화끈한 변신은 아이들만 안다.


남편과 나누는 그림책이 늘어간다.

지난 연말 아이들을 재우고 남편과 그림책을 같이 봤다.

<달리기>는 글밥이 거의 없는 그림책이다. 단체로 달리기를 하는 무리 속에 달리기가 늦은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달리기를 가로막는 각종 장애물에 고민 1도 없이 바로 튀어나간다. 높은 담도, 절벽도, 입 벌리고 기다리는 악어 앞에서도 그냥 뛰어간다. 이유도 고민도 없는 모습이다. 힘차게 달린 모두가 1등이고, 이내 곧 달리기 할 준비를 또다시 한다는 이야기다. 그 그림책을 남편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우리는 이제는 그만 달리자고. 막히면 때로는 쉬었다 가고 돌아가기도 하자고. 남들이 달린다고 덩달아 달리지 말고 우리는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으며 살자고. 그 말에 그림책에 시큰둥했던 남편이 눈썹을 추켜올리고 입을 동그랗게 만들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 일상 곳곳에 그림책이 스미니 종종 훗날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다. 머리카락 희끗한 할머니가 되었을 때 집에 찾아온 손주들을 위해 오래된 책장에서 낡은 그림책을 꺼내 소복이 쌓인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너희 아빠 읽어주던 책이라며 돋보기를 쓰고 앉아 느긋하게 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만 좋으려나?)


그림책과 함께 하는 일상을 나누고 싶은 가벼운 수다가 필요해 쓰기 시작한 글이 좀 길어졌다. 이제 다시 오늘의 그림책을 고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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