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어... 안녕..?”
“…”
“... 안녕?!”
“어? 나한테 인사한 거야?”
“아! 가까이 있길래 들릴까 싶었는데 들었구나! 반가워.”
“그래 나도 반가워.”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저 영화 말이야, 너무 지루하지 않니? 지금 몇 시간째 여기 있는 건지 모르겠어. 어둡고 공기도 탁하고 답답하기만 해.”
“답답? 후.. 진짜 답답한 게 뭔지 모르는구나. 나를 봐. 내 몸을 누르고 있는 이 무거운 플라스틱 덩어리를 보라고. 저게 내 등에 붙어 있는 몇 주 동안 얼마나 답답한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도대체가 여자들이란 왜 우리를 그대로 두질 못하는 건지 참.”
“그러게 정말 답답하겠다. 수백 년을 돌에 깔려 있었다던 어떤 유명한 원숭이 이야기가 생각나는데. 그렇지만 넌 길잖아. 마음껏 자랄 수 있나 보구나. 나를 봐. 나는 조금만 손끝을 벗어나도 잘려버리고 말아. 손톱깎이라는 그 냉정한 녀석이 근처에 오기만 해도... 으으 어찌나 서늘하고 끔찍한지 넌 잘 모를 거야!”
“저런. 나도 가끔 그 녀석을 만나긴 해도 너처럼 자주 마주치진 않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그래서 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자라나. 자라는 게 무섭거든. 이 인간은 바이올린을 켜. 그래서 내가 조금만 자랐다 싶으면 재깍재깍 깎아버리고 말지. 그런데 바이올린은 손을 많이 쓰는 악기잖아? 너도 알다시피 그러면 우리는 자극을 받아서 더 빨리 자라게 되니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다니까. 완전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야.”
“오 이런! 마치 비운의 주인공 같은데. 아, 주인공 하니까 말인데 이 여자는 배우야. 당최 무슨 역할을 주로 맡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자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아. 알록달록하고 끈적이는 걸 자꾸 발라대서 숨 쉴 구멍을 막고, 거친 바위 같은 거로 튼튼한 가장자리를 갈아버리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내 조각들을 보는 건 정말이지 괴로운 일이야.”
“이럴 수가. 그건 정말이지 피 말리는 일이구나. 깎이는 건 잠깐만 참으면 되거든. 깎여나간 내 일부는 어디론가 튀어나가 눈 깜빡할 새에 사라져 버리지. 깎이는 게 일시불이라면 너의 고통은 할부라고 할 수 있겠어."
“맞아, 정말 힘든 삶이야. 머리카락이나 우리나 죽은 각질에 불과하다면서 정작 인간들은 우리를 엄청나게 차별하곤 하지. 머리카락은 조금이라도 상할까 봐 주기적으로 다듬어 주고, 좋은 샴푸와 린스로 매일 감기고 빗어주면서 도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홀대하는 거야? 우리는 손을 보호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왜 우리의 노력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저 멍청한 미역 나부랭이 같은 건 저렇게 애지중지하는 건데?”
“워워 진정해. 그렇게 성내다 위로 들려버리고 말겠어. 손가락에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어디 부딪힐 때마다 고압 전류가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라고. 으으... 정말이지 끔찍해. 아무튼, 들리고 싶지 않거든 진정하고 몸을 낮춰.”
“쳇. 아무튼 인간들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필요가 있어. 우리가 조금만 짧아지기만 해도 아무것도 못하고 쩔쩔매면서 너무 오만하다니까.”
“맞는 말이야. 인간들은 우리에게 너무 무심하지. 저번 주에도 말이야… 어? 영화 끝났나 보다. 이제 갈 시간이야. 이 바이올리니스트는 언제나 영화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거든. 그럼 나 먼저 간다! 쥐에게 먹히지 않길!*”
“그래, 너도 쥐에게 먹히지 않길!”
*쥐에게 먹히지 않길: 손톱들의 세상에서 통하는 인사말. 손톱을 먹고 인간이 된 들쥐가 나오는 전래동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손톱들은 쥐에게 먹히는 것을 불명예로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