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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라 오드리 Oct 22. 2023

그녀는 예뻤다

살살 우리동네 이야기

그녀는 예뻤다. 건널목 하나만 건너면 백화점이 있었다. 어린이집을 보내기 전부터 문화센터에 다녔는데 오며 가며 마주치는 말간 얼굴의 젊은 엄마는 유난히 하얀 얼굴에 예뻤다. 우리 아이와 비슷해 보이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마트 앞에서 아파트 큰 길목에서 빵집 앞에서 우린 자주 마주쳤다. 그렇게 자주 마주치니 어느 정도 내 얼굴이 익을법한데 인사를 해도 그냥 지나쳤다. 언젠가 마주한 그녀 얼굴은 유난히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그녀의 발걸음이 그렇게 헛헛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한동안 안 보였는데 우연히 유치원 등원 버스 앞에서 그녀를 만났다. 반가움에 한걸음에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우린 같은 유치원 학부모가 되었다.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친정도 시집도 먼데다 주말부부였던 내게는 이웃이 정말 소중했다. 급할 때마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가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었다. 같은 유치원에 마음이 맞는 엄마 넷은 모두 나와 처지가 비슷했다. 돌아가며 아이들 하원을 봐줬고 함께 생일파티를 하고 함께 둘째를 낳고 함께 많은 것들을 공유했다. 그중에서도 언니는 유난히 나와 생각이 잘 맞고 취향도 비슷해서 친자매보다 더 가깝게 지내고 있다.    

  

아이들이 6살 즈음 가까운 도서관에서 독서지도사 자격증 과정이 열린다길래 유치원 등원과 동시에 줄을 섰다. 가능 인원은 20명인데 내가 20번, 언니가 21번이었다. 다행히 우리 둘 다 수강할 수 있었고 20주에 걸쳐 긴 수업을 함께 했다. 손재주가 좋은 언니는 북아트를 잘했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수업계획서를 잘 만들었다. 그 길로 언니는 한복 만들기 수업을 신청했고 나는 영어 그림책 독서지도사 수업을 신청했다. 우린 각자의 진로를 찾아 고군분투했다. 아이들은 유치원 생활에 충실했고 우린 육아 후 다시 사회에 나가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 가운데 유치원에서 열리는 행사마다 또 열심히 참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가 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가 1학년이면 엄마도 1학년이라고. 나도 언니도 1학년이지만 우린 조금 달랐다. 언니는 조심스러운 1학년, 나는 적극적인 1학년. 하지만 그 대상은 둘 다 아이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나는 보다 적극적으로 내 진로를 위해 움직였다. 더욱 열심히 도서관 강사로 뛰었고 언니는 조심조심 더 다양한 수업을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평일 오전에 주부를 위한 저렴한 클래식 공연에 언니와 함께 갔다. 아마 현악 4중주였을 거다. 얼마만에 클래식 공연인지 가슴 벅차 언니를 바라봤는데 언니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마 결혼 전 자신이 좋아했던 그 어느 순간이 떠올랐지 않았을까? 우리 둘 다 육아와 삶에 몰두하느라 어느새 나를 잊고 있었다. 모른 척 외면해왔지만 지금, 이 순간 살며시 고개를 든 것 같았다. 다시 찾아줘서 고맙다고. 우린 그날부터 매달 한 번씩 함께 공연을 보러 갔다. 1만 원짜리 공연을 보고 함께 햄버거를 먹는 게 호사였다. 아이들 하원 시간 때문에 근사한 밥을 먹지는 못했지만, 나란히 앉아 감동을 공유하고 배를 채우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언니는 참 근사한 사람이다. 

옷을 잘 입는다. 편안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포인트가 있었다. 색의 조화를 알았고 자신이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거추장스럽지 않고 과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아줌마 같지도 않았다. 가방이나 액세서리를 센스있게 착용했고 선물도 부담되지 않도록 했다.      


무엇보다 언니는 늘 탁월한 선택을 했다. 나는 대충 한 끼를 때웠지만, 언니는 한 끼도 이렇게 저렇게 고민을 많이 하고 내가 소중한 사람처럼 느껴지도록 배려했다. 언젠가 비 오는 날 근교에 호떡을 먹으러 갔었는데 고작 그걸 먹으러 가야겠냐고 투덜대던 내가 이제 비 오는 날이면 코끝에 달큰하고 고소한 호떡 냄새가 생각난다. 그래서 언니의 손동작 하나하나는 세심함과 고뇌가 담겨 있어 보인다.      


인간미가 있는 따뜻한 사람이다.

입이 짧은 세 식구가 사는 집은 먹을게 잘 줄지 않는다며 집에 들어온 과일이며 선물을 늘 나눔 한다. 문고리에 걸린 배 두 개, 갈색 봉지에 담긴 꽈배기, 포도는 너무 많아서 문 앞에 두고, 명절에 들어온 햄, 각종 기름도 어김없이 문 앞에 두고 간다. 또 누구나 쉽게 사귄다.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드는 영어 선생님도, 현관에서 가끔 마주치는 친정 부모님도 얼마나 살갑게 대하는지 언니를 만나면 다들 기분이 좋다고 한다.      

가까운 사람이 늘 행복하면 좋겠다. 


전공도 살리고 재능도 살려서 공방을 열었다. 어디에 정착하려나 궁금했는데 가까운 곳에 도자기를 굽는 공방을 열어 각종 화분, 그릇을 굽더니 최근에는 수업도 하고 있다. 덕분에 나도 가끔 가서 뚝딱뚝딱 한두 개 만들고는 하는데 제법 넓은 곳에 햇살이 잘 들고 곳곳에 식물이 놓여있어 가면 마음이 참 편안해지는 곳이다. 공간도 사람을 닮는지 핑크빛 벽과 잘 정돈된 선반이며 책상이 언니처럼 예쁘다.      


초기에는 시장으로 연결되지 않아 힘들었는데 요즘은 주말에도 일이 있을 만큼 바빠졌다. 무엇보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고 즐겁게 사는 언니가 좋다. 십 년 전 유치원 버스를 함께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언니랑 친해지고 싶었다고 했더니 언제 나를 봤냐며 의아해했다. 주변에 워낙 관심이 없고 그때 당시 많이 힘들었던 언니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여러 번 마주쳐 인사했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 무척 미안해했다. 자신을 돌볼 겨를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게 다행이었고 언제고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 같았을 것이다.     


요즘 우린 둘 다 삶에 큰 산을 하나 넘고 있다. 

언젠가 비 오는 날 언니한테 따끈한 국밥 한 그릇 먹자고 청했다. 속이 텅 빈 것 같아 뭐라도 넣어야 했다. 늘 그렇듯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안부를 나누는데 언니가 말이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우산으로 가려진 언니를 마주 보니 언니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밤늦게 명절 핑계로 선물을 들고 간 나는 늦은 밤까지 언니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살면서 누군들 굴곡이 없겠느냐마는 언니가 아픈 건 참 힘들었다. 그때마다 들어주는 그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우린 함께 울고 다시 배를 든든히 채워가며 십 년을 보냈다. 공연장에 가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눈물을 펑펑 쏟는가 하면 누군가 말도 안 되는 행동으로 함께 분개하고 가끔은 공연이 끝나고 그냥 돌아가는 게 아쉬워 걷고 또 걸으며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수다를 떨었다.   

   

오래전 일이다. 

유치원에서 한 아이가 계단을 내려오며 발을 헛짚어 넘어졌다. 팔에 깁스 했고 선생님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다. 나와 가까운 지인의 딸이었는데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했던가. 선생님이 제대로 보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며 선생님과 원장님한테 못되게 굴었다. 몇 날 며칠을 유치원에 쫓아다니며 보상을 해라 무릎 꿇고 사죄하라며 유치원을 들쑤셨다. 보다못해 내가 엄마한테 너무 그러지 말라 한 소리했는데 그게 화근이 되어 아침 등원 길에 아이들 앞에서 아이 아빠에게 쌍욕을 들었다. 그땐 참 무슨 오지랖이었는지.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동네 창피는 다 당했다. 다행히 그때 옆에 있던 언니가 나서서 나를 보호해줬다. 무슨 경우냐며 다른 학부모한테 상황설명도 하고 자칫 엉뚱한 오명을 썼을 나를 구해준 사람이다. 다시 생각해도 치가 떨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친 그 사람은 나를 피해 다녔다. 그 아이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먼 곳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결혼을 택한 이유는 경제적으로 독립할 자신이 없었고 세상에 버팀목이 되어줄 사람을 찾고 싶어서였다. 그땐 왜 그렇게 나약했는지 혼자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결혼하지 않으면 왠지 부족한 사람처럼 보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만 그랬던 건 아닌 것 같다. 남편도 나와 비슷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채워줄 반대의 사람을 찾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 이만큼 살아보니 결혼은 한 사람을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둘이 세상을 버티고 살아가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 결혼이 아니었나 싶다.      


같이 사는 남편보다 서로를 더 의지하고 살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찌 보면 참 다행이다. 만약 언니도 없었다면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할 때 그때마다 어떻게 넘겼을까.           

우린 생일도 며칠 차이 나지 않는다. 

나처럼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녔던 언니에게 언젠가 긴 여행을 다시 간다면 꼭 언니랑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버릇처럼 했는데 내년 생일에는 꼭 둘이 1박이라도 여행을 다녀오자고 약속했다. 맥주 반 잔도 못 하는 언니를 꼬드겨 간신히 한 캔으로 늘려놨는데 요즘은 좀처럼 만나지 못해 다시 주량이 줄지 않았나 걱정이다. 맥주밖에 못 하지만 살살 꼬셔서 작은 회 한 접시에 소주도 한잔해야겠다. 아무 말 없이 석양을 바라보고 밤새 수다를 떨어야지. 새벽에는 꼭 깨워서 새벽바람 맞으며 산책도 하고 누룽지로 속도 풀어야겠다. 배를 좀 채우면 한 숨자고 일어나서 또 어디든 걸으며 수다를 떨고 싶다.  

    

사는 게 뭐 별건가 싶지만 아무렇게나 덧없이 살고 싶지는 않다. 비바람 맞으며 살아보니 더 단단해진 건지 하고 싶은 것도 욕심도 많아졌다.    

  

그중에서도 꼭 하나 바라는 점이 있다면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에게 꼭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 오늘 이 시간을 헛되지 않게 지나치고 싶지 않은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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