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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끝찡 Nov 19. 2019

그 겨울, 혼자 모스크바에서

혼자라고 쓰고 외롭지 않다고 읽는다



 여행을 가기 며칠 전 가르마 펌을 했다. 이유는 M자 탈모 때문이었다. 점점 넓어지는 이마를 어떻게든 가려보자는 생각에 펌을 하게 된 것이다. 여행까지 와서 모자 쓰면서 사진 찍고 싶진 않았다. 펌을 하곤 항상 드라이에 신중하게 된다. 드라이가 잘 나오면 그날따라 기분이 좋더라.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7박 8일을 마무리하고 모스크바에서의 첫날! 드라이도 잘 나왔다. 비록 혼자 여행 왔지만 멋도 좀 부려본다. 기분 좋다! 볼쇼이 극장에서 하는 <돈키호테> 공연마저 좋은 자리를 예매했다. 굿! 모스크바를 즐기자!




<모스크바 아르바트거리 (왜 이렇게 다 건물이 기울어져 보이지?)>


 여행에선 길을 잃어도 그건 필연적으로 여행이 된다. 어차피 혼자 모스크바에 온 건 모험이었다. 안전과 모험은 양립할 수 없다. 그래서 혼자 이곳저곳 누비며 모험을 즐긴다. 오늘은 어딜 가던 내가 처음 가보는 곳이다. 오늘은 내가 뭘 하던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지금이 즐겁다. 그렇게 즐겁게 두어 시간을 돌아다녔다. 딱 거기까지 즐거웠다. 내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망각하고 싶었던 것. 여기는 가장 추운 나라 러시아였고 가장 춥다던 1월 달이었다.




<드라이 잘 나왔는데...>

 너무 추웠다. 숨을 들이마시면 골이 아팠고 피부조직이 파괴될 것 같았다. 그래도 몇 시간을 버텼다. 오늘 드라이 잘 나왔는데 자존심 상 털모자는 쓸 수 없다. 추위 따위에게 지고 싶지 않다. 점심까진 그래도 후드로 버텨보기로 했다.




<모스크바의 북한식당인 고려>


 블라디보스토크의 평양관에서도 평양냉면을 먹었다. 모스크바에서의 평양냉면도 놓칠 수 없었다. 이한치한! 추위는 추위로 다스리는 법! 평양냉면은 겨울에 먹어야 더 맛있는 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슴슴한 평양냉면과는 맛이 다르다. 면이 생각보다 달달하고 미끌미끌하다. 첫맛에 당황했지만 이내 음미하며 먹기 시작했다. 먹을 땐 몰랐지만 또 자꾸 생각 나는 맛이다. 그러나 나는 먹고 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눈보라가 날린다. 냉면을 먹은 덕에 몸이 더 차가워졌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털모자를 쓰고 말았다. 한국에서 털모자를 패션으로 썼지 추위 때문에 쓴 적은 없었다. 나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큼 잘 지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가 보다. 결국, 난 추위에 지고 말았다.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거리를 더 걸어 다니고 싶었지만 추위 때문에 포기했다. 가까이 있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을 가기로 한다. 이곳은 푸쉬킨 미술관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지만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론 푸쉬킨 미술관보다 더 좋았다)


 러시아 종교개혁을 보여주는 수리코프의 <귀족 부인 모르조바>, <총기병 처형의 아침> 필두로 상당수 좋은 작품들이 많이 있더라. 개인적으론 런던 내셔널 갤러리보다 좋은 예술품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모스크바의 예술품들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건 과거 공산국가였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한다. 훑어서 둘러만 봐도 족히 두어 시간은 걸린다. 조금 더 여유 있게 보고 싶었지만 볼쇼이 극장 <돈키호테> 공연 때문에 서둘렀다.

  



<볼쇼이 극장으로 가는 길>


 볼쇼이 극장으로 가는 길, 모스크바의 상징인 붉은 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거대한 크렘린궁과 테트리스에서만 보던 성 바실리 대성당까지. 어차피 다음 날, 투어 신청으로 둘러보게 될 것이니 빠르게 볼쇼이 극장으로 이동한다.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를 보게 되다>


  영어권 나라가 아닌 곳에서 영어를 쓰면 이상하게 자신감이 생긴다. 영국에선 그렇게 영어를 버벅거리면서 말했는데 러시아에선 러시아 사람들이 영어를 못하다 보니 자신 있게 영어로 말하게 된다. 자신 있게 영어로 말하고 예매한 티켓을 수령했다. 아, 그런데 아뿔싸... <돈키호테>인 줄 알았는데, <돈 카를로>였다. 나는 '돈'자만 보고 <돈키호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돈 카를로>는 생전 처음 듣는다. 그냥 이것도 여행의 묘미지! 하면서 쿨하게 넘기자!


 기왕 보는 거 재밌고 즐겁게 보기로 마음먹는다. 공연의 내용보다 중요한 건 내가 볼쇼이 극장이라는 곳에서 공연을 본다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공연을 보면서 알았다. 뮤지컬인 줄 알았는데 오페라 공연이었고 이탈리아어로 공연을 하고 있고 러시아어 자막이 흐르고 있었다. 배우들이 노래를 길게 부른다. 신기하기만 할 뿐 내용을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다리를 꼬집어가며 졸음을 참았다.


 인터미션 시간, <돈 카를로> 줄거리를 검색하여 속독하였다. 그리고 다시 집중하며 보았지만 여전히 재미없었다. 아무리 내가 언어를 몰라손 치더라도 정말 이걸 사람들이 재밌게 봤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3시간의 오페라 공연이 끝났다. 끝남과 동시에 약 5분 간의 기립박수가 이어진다. 다들 "브라보~!"를 외친다. 나도 괜히 그냥 모자란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함께 박수를 쳤다. 예전에도 느낀 건데 유럽 사람들은 커튼콜 때 손바닥을 부서질 정도로 박수를 치더라. 나도 덩달아 손이 아프도록 쳤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설렁설렁 박수를 쳤는데 박수 소리는 더욱 커지더라. 이 사람들... 정말 이 공연을 재밌게 본건가?




<벤치, 랜드로바, BMW 등등 각종 좋은 차가 보였지만 모스크바에선 의미없어 보였다>


 공연이 끝나고 밖을 나왔더니 눈이 수북이 쌓여 있다. 호텔까지 걸어가는 길에 공연 내용을 생각했다. 그렇게 집중해서 봤는데 내용조차 알지 못한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재미보다 의미 있었다고 스스로 합리화한다.


 그렇게 호텔로 도착했고 모스크바의 첫 날을 마무리했다. 추위 때문에 얼굴이 따갑고 머리까지 얼얼하다. 시베리아만 추울 줄 알고 열차 동료들에게 핫팩을 나눠 준 것을 후회했다.


 처음 맞이 하는 공기, 장소, 경험들... 아침부터 저녁, 밤까지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하루를 만들었다. 힘들기도 했고 외롭기도 했고 공연이 지루하기도 했지만 나는 오늘 무척 즐거웠다. 모든 게 다 처음이니까 말이다. 이런 게 여행의 맛이 아닌가!




<나는 이날 4만5624보 38키로미터를 걸었더라>


https://youtu.be/QEuCn0XjA_4

<모스크바에서 찍었던 영상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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