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끝찡 Oct 31. 2019

엄마의 목숨 값

겨우 2000만 원...



 엄마의 보험금이 나왔다. 겨우 2000만 원이었다. 엄마가 입원했던 입원료를 포함하면 2400만 원 정도이다. 엄마는 몸이 많이 좋아지지 않자 그 많던 보험을 해지했었다. 그래서 고작 나온 보험금, 2000만 원. 그만큼 우리 가족은 엄마의 죽음에 대비하지 못했다. 상속자인 아버지와 나, 그리고 동생, 아버지는 600만 원을 가져갔고 동생과 난 각각 700만 원을 가져갔다. 아버지가 조금 양보해 적당히 대략 3분의 1로 나누게 되었다.  


 엄마의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니 2000만 원은 한없이 초라했다. 그렇다고 2000만 원이 엄마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엄마는 한없이 초라했던 존재였나라는 생각에 속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네이버, 다음, 구글에서 엄마 이름 석자, 권, 용, 숙을 검색 했더니 우리 엄마에 관한 페이지, 기사는 단 한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엄마는 그저 우리 아버지의 아내, 할머니의 며느리, 나와 내 동생의 엄마였을 뿐이다. 엄마는 대한민국에서 그저 보통 평범한 삶을 살았던 그 이상, 이하도 아닌 그런 존재였다. 더 슬픈 건 이젠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거다. 


  "엄마는 생전에 너무 불행했잖아... 대신 엄마는 사후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줄게." 


 산소에서 이렇게 다짐했던 적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걸어도 걸어도>라는 명작을 만들었듯, 엄마를 위한 작품 하나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녔던 엄마의 가치를 높여주고 싶었다. 엄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였다.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마냥 슬퍼할 수 없었다. 슬프지만 딛고 일어서야만 한다. 유독 추웠던 겨울, 나는 더 추운 곳으로 떠나길 마음먹었다. 그곳에서 엄마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열흘 뒤 무작정 떠났다. 그렇게 춥다는 1월의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타게 되었다. 

 

<창가에 엄마 사진을 끼워두고 엄마의 핸드폰이 꺼지지 않게 충전하곤 타임랩스 영상을 매일 찍었다>


이전 09화 아버지도 애쓰고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