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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끝찡 Nov 17. 2019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2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기적적으로 일몰시간에 바이칼 호수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결자국 그대로 얼어있는 바이칼 호수를 보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자연을 보고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내달리고 러시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쿠츠크 역에 내려 몇 시간을 달려 바이칼 호수 위를 직접 걸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생애 가장 만화 같은 순간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 바이칼 호수, 태양이 이상하리만큼 크코 잘 보였다>




 이르쿠츠크에서 짧은 일정을 마무리하고 다시 본래 목적이었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했다. 이번엔 4인실인 2등석이다. 러시아 인들을 직접 만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다시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열차 안으로 올라섰다. 내 자리를 찾아갔더니 30대 엄마와 어린 아들이 앉아 있었다. 내 자리 맡은편엔 60대 할머니가 있었다. 내가 티켓을 들고 내 자리라고 이야기하니 30대 엄마와 어린 아들이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맞은 편의 할머니를 배웅 나왔나 보다. 밖에서 엄마와 딸은 웃으면서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대충 "엄마 젊은 남자랑 가니까 좋겠네." 하며 엄마를 놀리는 것 같았다.   


<2박 3일 간 룸메이트였던 라이나>


 열차의 출발 시간에 이르자 할머니가 손주와 딸을 꼭 안아준다. 손주와 딸은 열차에 내려 차창 밖에서 할머니를 바라본다. 이제 열차가 움직인다. 딸과 손주는 할머니를 향해 손을 흔든다. 할머니는 딸과 손주에게 보이지 않는 순간까지 손키스를 날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를 보고 군입대할 때 나를 보며 눈물 흘리던 엄마에게 조금 더 힘차게 손을 흔들어줄걸이라며 괜히 뒤늦은 후회를 했다.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눈물 닦을 휴지를 전달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제길, 너무 나댔다. 그래도 나는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 계속 말을 걸었다. 그녀는 영어를 단 한마디도 할 줄 모른다며 계속 손사래 쳤다. 러시아 번역 어플을 통해서 말을 걸어도 그녀는 부끄럽다며 거절했다.


 나는 계속 그녀에게 들이댔다. 내가 35살이라고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러시아 사람들은 놀랐는데 그녀는 아무런 표정이 없다. 먼저 내 이름을 말해주고 이름을 물어보았더니 그제야 겨우 라이나라고 답한다. 라이나에게 다시 내가 계속 이야기해도 아무런 주목을 끌지 못했다. 같이 라면을 먹자고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고 5분 뒤, 라이나는 귤을 까기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귤을 까고 옆에 누군가 있으면 두어 개 정도는 줘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그녀는 귤을 까고 혼자 다 먹는다. 참나, 내가 졌다.


 라이나는 손바닥 만한 책을 쉬지 않고 읽는다. 거의 책을 다 읽었을 때쯤 다시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가방엔 책이 다섯 권이나 있더라. 말 걸기를 포기하고 말았다. 라이나는 책을 보면서도 운다. 잘 때면 또 딸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대체로 감수성이 풍부한가 보다. 그래서 톨스토이, 푸쉬킨, 도스토옙스키, 체홉 같은 문학가를 배출했나 싶다.




 그렇게 라이나와 나는 아무 말 없이 이틀을 보냈다. 그러다 아주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 라이나는 나에게 커피, 치즈를 건넸다. 나는 보답으로 작은 쓰레기통을 만들어서 같이 쓰자고 했다. 그리고 잠깐의 식사 시간을 통해 다시 번역 어플을 통해 그녀가 61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의 딸을 3년 만에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키로프라는 인구 40만 명이 사는 작은 도시. 러시아는 땅이 워낙 넓어서 헤어지면 다시 만나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라이나는 이제 하루만 더 있으면 키로프에서 내린다.


<B612로 알렉스의 사진을 찍어 줬다. 이 사진은 알렉스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이 되었다>


라이나가 내리기 직전 또래의 남자, 알렉스가 같은 방 룸메로 오게 되었다. 알렉스와 라이나는 단 한두 시간 동안 여러 말을 하더라. 괜히 샘이 났다. 그리고 라이나는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키로프에서 내렸다. 그런 그녀를 섭섭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래도 나흘이나 같은 방을 썼는데 좀 그랬다. 그런 눈빛을 느꼈는지 짐을 내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나를 꼭 안아준다. 뭐라 말을 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는 딸을 보냈던 그날처럼 날 보내며 눈물을 흘린다. 마치 만남 후 이별을 너무 잘 알고 있어 정을 주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에게 그렇게 대했나라며 스스로 정당화했지만 그래도 혼자 귤 까먹는 건 너무 했다.




<알렉스와 나, 그리고 알렉산드(왼쪽사진), 알렉산드와 알렉스, 그리고 나 (오른쪽사진)>


 라이나가 떠나고 알렉스는 나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알렉스는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알았고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나는 라이나와 함께 한 나흘이 너무 지루했다고 이야기했고 라이나는 나를 끝까지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라이나에게 그렇게 코리아, 코리아라고 이야기했는데 중국인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알렉스는 나에게 러시아어 몇 개를 가르쳐 주었고 나는 알렉스에게 라면, 볶음밥을 해주었다. 알렉스는 먹을 때마다 본인이 먹어 본 음식 중에 최고라고 한다. 이후 라면 밥 까지 해줬더니 그것마저 먹어 본 것 중 최고로 맛있다고 말한다. 나는 알렉스를 신뢰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옆 방에 있던 23살 카자흐스탄 남자 알렉산드는 라면 냄새에 홀렸나 보다. 그 역시 우리 방으로 넘어와 함께 라면을 먹었다. 알렉산드는 러시아 인 여자 친구 나타샤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길이란다. 알렉산드는 자랑스럽게 나타샤의 사진을 보여줬다. 그런데 알렉산드보다 영 나이가 많아 보인다. 몇 살이냐고 물어보니 나타샤는 36살이라고 이야기했고 이번이 처음 만나는 건데 2년이나 사귀었단다. 그녀와 처음 만나는 건데 모든 짐을 싸서 모스크바에 왔단다. 잘 이해는 안 되고 말리고 싶지만 알렉산드의 표정이 너무 해맑다. 알렉스와 나는 그냥 그의 사랑을 응원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차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출장 온 알렉스, 여자 친구를 만나러 온 알렉산드, 그들과 서로 페이스 북 친구를 맺고 언젠가 또 보자고 다짐했다. 서로 깊은 포옹을 하며 웃으며 헤어졌다. 그렇게 7박 8일 간, 9288km의 여정이 끝났다. 그렇게 다시 무거운 짐을 이끌고 호텔로 향했다.




 잠이 들었다. 너무 고요했다. 왜 열차가 움직이지 않지? 하며 잠에서 깼다. 아, 맞다. 호텔이지? 호텔이라 생각하니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열차 안이 너무 편안했나 보다. 흔들리는 열차, 그리고 경적소리 마저 엄마의 품처럼 따듯했는데 다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허해졌다. 창문을 열어 일출을 보고팠지만 건물들 사이로 태양은 보이지 않았다. 열차에서 보던 일출과 일몰이 그리워졌다.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 가니 귤이 가장 먼저 보이더라. 라이나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식사를 간단하게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잠을 자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이상하게 자꾸 라이나가 생각난다. 알렉스와 알렉산드에게는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다짐했지만 라이나에겐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라이나를 애써 만나야 할 이유도 애써 다시 만날 방법도 없다.




 다시 엄마의 사진을 꺼내 창가에 끼워뒀다. 엄마의 핸드폰으로 찍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타임랩스들을 훑어보았다. 실리폰 핸드폰 케이스를 물에 살짝 묻혀 창문에 붙여서 찍었었다. 찍은 영상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컴퓨터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영상에서 핸드폰이 창문에서 떨어진 거다. 떨어진 핸드폰을 다시 라이나가 창문으로 붙이고 있더라. 라이나가 안아줄 때 조금 더 꽉 안아줄걸 하며 후회했다. 다신 그녀를 만나기 힘들겠지? 돌아가신 엄마처럼 말이다. 자꾸 라이나가 아른거린다. 라이나가 보고 싶다.


 나와 엄마와 단둘이 있으면 엄마는 계속 내게 말을 걸지만 나는 아무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라이나에게 말을 걸면 라이나는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엄마와 같은 나이,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대답해도 말을 하지 않는 사람, 이젠 나만 엄마에게 말을 하고 있으니 라이나는 어쩜 우리 엄마였다. 오랜만에 다시 울음을 뱉어냈다. 라이나에게 조금 더 잘해줄 걸, 엄마에게 더 잘해줄 걸, 생전에 엄마에게 이 아름다운 시베리아 벌판을 구경이라도 시켜줄 걸.


 그렇게 7박 8일간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 여행이 끝났다. 어쩜 내 인생에 가장 꿈에 가까웠던 체험이었다. 그 곳에서 엄마를 다시 만났으니까...




https://youtu.be/ceKFHosEwI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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