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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끝찡 Oct 29. 2019

엄마가 좋아하는 걸 몰랐다

엄마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만 좋아해서 



 2017년 크리스마스, 할머니는 아흔을 일주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아프시던 할머니를 엄마가 매일 챙겼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는 급속도로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엄마의 병간호를 가족들이 번갈아가며 맡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밭에 있는 감을 따는 일을 비롯해 옆 집에 김치를 받아오라는 둥 여러 잡일을 시켰다. 엄마는 이런 걸 다 아무 말 없이 했구나 싶어 할머니가 미웠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겨우 보름이 지났을 무렵, 할머니가 엄마에게 미안해선지 울고 있었다. 그런데 할머니는 정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아이고 민아... 느그 아부지 주변에 괜찮은 아줌마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라... 느그 아부지 불쌍해가 우야노."


 이 말을 다른 이에게 한 번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들었는데 그게 할머니가 될 줄 몰랐다. 할머니에게 엄마는 정말 소모품이었던 거다. 아버지에게 밥을 챙겨줘야 할 사람, 할머니에겐 뒤치다꺼리를 해줘야 할 사람, 그런 사람이 엄마였다. 아무리 엄마가 그러한 일을 했다손 치더라도 나에겐 그리고 아버지에겐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에겐 아녔나 보다. 우리 할머니가... 적어도 우리 할머니가 어떻게 이런 말을 나에게 할 수 있지? 정말 너무 미웠다. 


 그 후, 나는 할머니를 한동안 보지 않았다. 그만큼 미웠다. 그러다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을 때서야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더라. 원망했던 할머니에게 또 미안해졌다. 그래도 이상하게 눈물이 나진 않더라. 그렇게 할머니는 2017년 크리스마스 날, 돌아가셨다.    




 2017년의 마지막 날, 할머니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냥 최소한 담담하고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 생각한 곳은 혼자 종묘를 가는 것. 종묘를 돌며 2017년을 반성하고 그리움을 그곳에 묻었다. 걸어서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 2018년에 읽을 책들을 샀다. 직후 커피를 마시며 드디어 스타벅스 2018 다이어리를 오픈한다. 나름의 계획을 간단하게 적는다. 그리고 산 책들의 30-40페이지 정도만 다 읽어본다. 그래, 여기까진 차분하고 의미 있었다. 


 그때 지인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 돌아가신걸 뒤늦게 알았다며 미안하다면서 하는 말 따위가 아버지 이제 고생 덜 하시겠네. 다행이다라고 한다.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씨발...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라는 생각에 더 화가 났다. 그래도 다신 이 씨발새끼에게 연락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기분이 좀 잡쳤다. 기분도 영 그렇고 2018년이 몇 시간이 채 남지 않자 종각에 점점 사람들이 몰린다. 빨리 집에 가야 했다. 혼자 또 저녁을 먹기 싫어 그냥 패스 하기로 한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가 신촌을 지날 때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에게 새해 복 많이 받자고 했다. 올해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일들이 있어서 내년엔 반드시 좋은 일들만 있을 거라며 웃자고 다짐했다. 동생 부부가 엄마가 좋아했던 치킨을 사들고 같이 먹자고 했단다. 같이 못 먹어 죄송하다 했고 내년엔 꼭 내 영화를 보여드리겠다며 다짐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저녁을 꼭 챙겨 먹으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갑자기 눈물이 나도 모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괜히 옆에 아주머니의 눈치가 보인다.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립밤을 얼마나 덕지덕지 바르고 키스를 했으면 세 달이 지난 지금까지 얼룩으로 남아있을까?>



 2017년이 빨리 가길 빌었다. 그만큼 너무나도 벅차고 힘들었다. 그런데 아마도 평생 2017년을 필사적으로 그리워하겠지? 할머니에게 올해 꼭 버티시고 내년에 동생 손주 꼭 보셔야지라고 했는데 2017년을 넘기지 못했다. 어쩜 그 새끼 말처럼 차라리 안 좋은 것들 2017년에 몰빵 했다고 생각하자! 엄마도, 할머니도.


 저녁을 패스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의 말에 좀 걸렸다. 엄마가 좋아했던 치킨을 사서 아버지 가게에 가고 있다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BBQ 맞지?"


 라고 물었고 동생이 아니라며 대답했다.


 "엄마 BHC 좋아했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BHC를 시켰다. 난 내가 좋아하는 BBQ만 시켜서 엄마도 당연히 BBQ 좋아하는지 알았지. 생각해보면 엄마는 내가 좋다는 건 다 좋다 해서 엄마가 뭐 좋아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좋다는 것만 해줬으니까. 여하튼 엄마가 좋아하는 치킨은 BHC.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가족은 연말에 같이 치킨을 먹었다. 앞으로 가슴 떨리게 행복하자!

행복하고자는 마음 먹는 것이 죄였던 시대는 없었잖아~ 2018년엔 내가 그 씨발새끼마저 용서할 수 있길.


<2018년을 맞이하여 2018로 하려고 했는데 8자 초가 품절이란다. 결국 그냥 더 의미 있게 2017년을 기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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