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위한 생각
Love in the present
남녀 간의 사랑 ... 그것은 본능이 만들어준 축복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 축복의 사랑이 빈곤한 시대를 살고 있다. 경제적 이유로, 각자의 성취를 위하여, 혹은 이상적인 상대를 꿈꾸며 눈앞의 사랑을 유보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 자신의 삶과 시간에 대한 가치가 갈수록 중요해져 가고 있는 현실과도 상통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연인들조차 바쁜 일과 속에 매몰되어 사랑할 시간을 빼앗기고 있으며 사랑의 헤어짐과 새로운 만남도 쉬워져 가고 있다.
사랑에 대한 현대인의 무의식적 해석은 눈앞에 넘쳐나는 소비재 상품들과도 또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아도 그 사랑을 대신할 만큼 다양하고 편리하고 멋진 대상들이 즐비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랑을 생각할 시간에 남자들은 게임을, 여자들은 쇼핑을 하고.. 심지어 애완동물들을 통하여 부족한 애정 결핍을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젠 사랑은 이들 매력적인 대체제들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랑의 실패가 주는 두려움과 심적 고통에서 회피하고자 하는 소극적 자세도 이러한 현상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을 것이다.
섹스에 대한 해석도 변화되고 있다. 남녀 간의 사랑을 섹스로 모두 직렬연결시킬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완성된 사랑은 섹스로 귀결된다는 생각은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필요충분조건도 사라지고 있다. 섹스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단지 욕구 해소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심지어 섹스의 가치가 사랑의 가치를 넘어서는 가치 역류의 시대로 다가서고 있다.
잠시 부모님 세대가 즐겨 보던 당시 영화 스토리들을 살펴보자. 그 시대에는 "사랑"은 삶의 명제이자 숙명이었고 그래서 당시 영화들은 사랑 타령이 중심 테마였다. 영화 속에서 남성의 목소리는 진지했고, 여성의 목소리는 애절했으며 그들의 불타는 두 눈이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신파적 과장이 스토리 몰입을 흐뜨러트릴만큼 영화 속 로맨티시즘이 화면에 가득했다. 지금 보면 참 촌스럽다고나 할까..
사랑의 방식에 대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논할 필요는 없다. 그냥 삶에서 사랑의 가치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 값어치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땅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랑을 꼭 해야 할까?
How to love
사랑이 부족한 시대,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진지하게 사랑의 가치를 되새겨 보자.
무엇보다 먼저 사랑은 절대적 믿음이다. 동방신기의 노래 "Love in the ice"에 이런 가사가 나온다. " 어두워진 밤하늘을 떠나지 않는 별처럼 사랑이란 믿음으로 영원히 함께 하는 꿈" 그렇다. 사랑은 과거나 지금이나 서로에 대한 믿음이며 그 믿음으로 맺어진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하는 소망이다. 얼음 속에서도 사랑은 믿음이 있다면 빛날 수 있는 것이며 반대로 믿음이 사라진 사랑은 공허한 홀로만의 메아리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그리고 사랑을 받으려면 절대적 믿음을 주고받아야 한다. 믿음이 없다면 사랑도 없는 것이다. 절대적 믿음으로 사랑을 하는 순간 눈앞의 현실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신세계가 열리는 기적을 만날 것이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는 사람과는 절대로 사랑을 해서는 안되며 만약 한다면 가장 어리석은 사랑이다.
두 번째로 사랑은 비교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공평한 평등가치를 지닌 존재이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지위를 얻는다고 해서 사랑을 더 커지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더 많은 능력을 가지게 되면 더 아름답고 멋진 사랑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착각은 다시 사랑을 경제적, 계급적 관점으로 평가하고 가난한 사랑을 천시하는 풍조를 낳기도 한다. 과연 그럴까? 물론 오늘날 돈 없이 무위자연으로는 살 수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다행히도 부자의 사랑이 더 값어치가 높은 사랑은 아니다. 그렇다 사랑은 각자의 소우주이며 고유의 가치이다. 나의 사랑을 다른 사랑과 비교할 수 있는 잣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부러워하는 마음이 착각을 낳은 것뿐이다.
세 번째로 사랑은 경계선이 없는 무조건적인 마음가짐이다. 사랑을 누구나와 할 수도 없고 아무 때나 느낄 수 없지만 만약 각자에게 사랑이 다가온다면 그것은 모든 조건을 순식간에 넘어서게 된다. 여기에 짝사랑까지 포함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란 마음이 생긴다면 모두 그런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모성애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무조건적이듯 남녀 간의 사랑도 그것이 사랑이라면 이성이 생각하는 모든 제약 조건이 사라지는 상태가 된다. 그 사랑이 현실 속에서 고통과 번민으로 발전되더라도 서로가 사랑한다면 그리고 사랑하려면 경계선이 무너져야 한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속에서만 사랑을 저울질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사랑은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넷째로 실리적 이해타산을 따지는 계산적 사랑은 영원히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 다리를 잃고 휠체어에 의지한 한 남자와 결혼한 여자의 실화가 어느 다큐멘터리의 소재로 등장한 방송을 보았다. "저 여자는 왜 지체장애인 남자와 결혼한 걸까?"라는 질문을 대부분 하게 될 것이다. 그 질문의 답은 과연 무엇일까? 사실 그 답은 그냥 그 여자는 그 남자와 어떤 과정을 거치며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것뿐이다. 만약 장애인과 결혼하는 대신 뭔가 숨겨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랑의 손실과 이익의 계산기를 두드린다면 당신은 사랑이 아닌 합리적 거래를 하는 것이다. 착각하지 마라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다큐멘터리에서도 그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장애인을 딴 세상 사람으로만 알고 살았어요" 그렇다. 그녀는 한 사람을 사랑을 한 것뿐이다. 방송에서 그녀는 더 열정적으로 긍정적으로 그의 반려자로서 멋진 인생을 살고 있었다.
끝으로 사랑은 본디 스스로 노력하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자 실천적 행복론자인 버트란드 럿셀은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으로 정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하듯이 일을 밤새 하듯이 사랑도 열심히 평생 노력해야 얻고 지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게으른 사람이야 말로 가장 인생을 게으르게 사는 것이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세상을 탓하며 사랑을 포기하며 사는 모든 이들은 이점을 꼭 알아야 한다. 단, 노력하라고 해서 아무에게 들이대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찾아 세계를 떠돌라는 것도 아니다. 먼저 사랑에 대한 마음가짐부터 업그레이드하는 노력이 출발이다. 우리 모두 사랑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