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점에 머무는 삶에 대하여

<상냥한 폭력의 시대>

by 낮의 그늘


실로 오랜만에 단편집을 읽었다. 사실 표지부터 내 취향인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발견한 첫날부터 아까워서 읽지 못했던 책이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색의 표지에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이 보인다. 고요한 그 풍경을 보고 이유 없는 감정의 흔들림을 느낀다면 당신은 이 소설집을 읽을 준비가 되었다. ...고 생각한다.



총 7개의 단편은 하나같이 일상적이다. 표지와 같은 분위기. 겉으로 보기에 평범할지라도 그 속을 까 보면 다른 무엇보다 시끄러운 사정이 범람한다. 새침하게 메마른 표정의 표지가 얄미울 정도였다.



그 여자의 태연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있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종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르르 포개지며 쓰러질 것이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저



가장 좋아하는 단편은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인데, 이 단편집에서 가장 폭력적이지 않은 소설이다. 어쩌면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일 수도 있겠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옛 애인인 미스조와 얼결에 연락을 주고받다 결국 그녀의 상주 노릇까지 하게 된 ‘나’의 이야기이다.


미스조를 잃은 뒤 화자는 키우던 고양이 인형인 ‘샥샥’과 그녀가 유산으로 남긴 거북이 ‘바위’를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다. 이 세계와 내가 반드시 이어져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그저 천천히 소멸할 것이라고.






가끔 현실의 잔혹성을 지나치게 -잔인할 정도로- 자극적인 형태로 묘사하는 소설이 있다. 그런 것을 읽으면 순간의 재미와 함께 영혼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흉터를 새겨 넣는 기분이 든다. 재미는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지고 손가락에 끈적하게 녹은, 솜사탕도 사탕도 아닌 것만 남는 것이다.


그런 잔혹사에 비하면 이 소설집은 간결하고 담백하다.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의 어떤 굴곡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혐오감보다는 공감이 느껴졌다.



책을 읽고 나서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소멸하는 중이라는 말이 자꾸만 머리에서 맴돈다. 현실의 잔혹사, 우리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두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겠지. 냉점과 공허가 갸륵한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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